저는 연평도 옆에 있는 섬에서 해군으로 군복무를 했었습니다. 7마일인가 8마일 떨어진 섬이었는데... 아오 분명 상황보고 한답시고 맨날 외우던건데 그걸 까먹었네요.

그런데 제가 있던 섬은 민간인이 살지 않는 따라서 민간 선박도 다니지 않는, 일종의 무인도였습니다.

사실 해군,해병해서 100명 넘는 인원이 사는 섬이었지만 "군인은 사람으로 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 섬은 무인도다." 따위의 자조적인 농담을 하곤 했죠.

 

그 섬에서 휴가를 나오는 방법은 두 가지 였습니다. 군용 보급선을 타고 평택이나 인천에 내리든지, 군용 보급선을 타고 연평도에 가서 민간 여객선을 타든지.

제가 운이 좋아 휴가를 자주 나온 관계로 연평도에서 지내게 된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2년 동안 5~6번은 간거 같아요.

첫 휴가 나올 때도 연평도를 거쳤고, 복귀할 때에도 운이 좋으면 연평도에 들렸다가 저희 섬으로 들어가곤 했으니까요.

 

그래서 연평도에 들어갈 때면 항상 기분이 꽁기꽁기 했습니다. 연평도에 들어간다는건 부대로 복귀하거나, 휴가가 하루 밀린다는걸 의미했거든요.

괜히 그 섬에만 들어가면 기분이 센치해지고, 나른해지고, 서글퍼지고... 하여튼 그랬다는 말입니다.

사실상 휴가 복귀 상황, 그러니까 귀대상황이지만, 그쪽 연평도 기지... R/S라고 하는데 하여튼 그쪽에서는 저희가 부대원이 아니니까 일을 시키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내무대에서 뒹굴거리는 꼴을 보기도 뭐하고 해서, 그 쪽 부대에서 지내야 할 상황이 생기면 부대밖 외출을 허용해주곤 했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좋다고 해군 정복차림으로 나가 섬 이곳저곳을 쏘다닌.... 것은 아니고 주로 피시방에 갔죠.

섬 내에 피시방이 한 곳 뿐이었는데, 거기 영업시간이 되게 이상했습니다. 거기 문이 안열려있으면 우리는 열어달라고 옆집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그랬죠.

그리고 휴가자 중 부사관이 껴있으면 살살 꼬셔서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이니 탕수육 따위를 시켜먹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짬뽕이 진짜 맛있었어요. 연평도 중국집에선.

 

그리고 저녁이 되어 멀리 보이는(만약 시정이 좋다면. 해무가 짙으면 바다에서는 한치 앞도 안보입니다.) 저희 섬을 보면서 괜히 아련한 기분에 젖어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전역한지 꽤 되었지만 아직 연평도의 전경은 머릿속에 아련하게나마 남아 있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케이블 티비에서 해주는 연평도사태 자료화면을 보는데... 일단 눈에 익은 풍경들이 펼쳐지니 반사적으로 반갑더군요.

처음에는 포격이 시작된 후 자료화면이 아니라 평소 연평도 전경을 보여주는 자료화면이었는데, 뻘에 박혀있는 물개-76을 보니 웃음부터 났었습니다.

그런데 연기가 치솟는 마을이며 산이며를 보고 있자니... 이게 더 이상의 현실감이 없어지더란 말입니다.

분명 대충 알고 있는 풍경이고 분위기 인데,  내가 아는 곳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시골집들이 붙어있는 마을이라, 한 집에 불이 나면 다른 곳에도 불이 옮겨 붙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은 별 일 아닌 듯 전해주시던 연평도 주민 아저씨의 전화 통화를 듣고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집들의 골목골목이 생생하게, 그 당시 날씨며 분위기이며 하는 것들과 함께 뭉개뭉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아니 그곳에 불이 나다니요.

 

훈련 중단을 촉구하는 통지문을 보내고 나서,

우리가 이렇게 일렀는데도 훈련을 하고 앉았다니. 아오 빡쳐.

라는 심정으로 북한에서 연평도를 포격을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치밀하게 준비된, 당연히 우리 군에서는 훈련을 진행할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한 행위일 것입니다.

소위말하는 정치적인 이유라는게 있겠지요.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분명 어떤 노림수를 가지고 한 행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유는 제가 잘 모르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냥 제가 알던 평화롭고 아련한 풍경이 그런 끔찍한 일로 훼손되고 상처받았다는 사실이 슬픕니다.

 

아니 솔직히 군인들끼리 전투든 전쟁이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라도 인명 피해가 나는 것은 너무도 안타깝고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겠습니다만,

사실 군인들은 그런 상황을 전제하고 수시로 훈련이란걸 하니까,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 상황을 헤쳐갈 수 있습니다.

군인들이 모두 용맹하고 애국심이 넘쳐서 유사시 자기 자리를 수호하는건  아니거든요. 그 동안 해 온대로, 아무리 무섭고 혼란스러워도,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하지만 민간인들은, 평상시 그런걸 의식하지 않아도 그런 상황은 군인들이 몸으로 받아준다고 암묵적으로 믿고 있으니까 일상 생활을 하는거잖아요.

나 살고 있는 곳 어딘가에 언젠가 폭탄이 터진다고 생각하면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거겠습니까. 노이로제 걸리고 말지.

 

그런데 북한에서 한 이번 행위는 그 이면에 깔린 정치적 저의가 무엇이든 간에, 이러한 믿음을 무너뜨리는 짓이었습니다.

화가 난다기 보단, 너무 치사한거 같습니다. 실제 전쟁이 나도 민간인에게 포격은 상호간 꺼리게 될텐데, 이런 식으로 민간인 지역을 폭격하다니요.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북한에서 이런 일을 벌인 까닭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 이번 행위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원한 바를 이루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일 것입니다. 내가 그 입장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슬픕니다. 여러 의미에서 두렵고 슬프고 안타깝고 그렇습니다.

 

연평도에서의 기억은 고작 관광 비슷한거 몇번 밖에 되지 않은 제가 이렇게 비통한 상황인데, 연평도 주민 분들이나 그곳이 고향이신 분들은 오죽할까 싶습니다.

지금도 총성이 멎지 않았을 세계 여러 분쟁지역의 주민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지는, 지금 제 심정으로는 상상도 가지 않습니다. 정말 끔찍하군요.

범인간적인 사랑과 관심이 있다면, 다른 무엇보다 그런 지역에서 전쟁이 종식되기 위해 조금이나마 힘써야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잘 처리되길 바랍니다.

 

단지 정치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 사태로 인해 물리적 정신적 피해를 입은 분들이 그 상처에서 빨리 헤어나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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