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살던 은영이 언니

2012.06.15 18:11

yusil 조회 수:4059

 

언젠가 일기장에 제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쭉 써 본적이 있어요. 살아가는 일에 '관계'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집중하기 시작했던 무렵이었는데, 중학교 때였던 거 같아요. 꽤나 공을 들여서 카테고리를 '가족학교, 학원, 성당, 동창' 등으로 나눴는데 어디에도 넣을 수 없는 이름 하나가 있어 한참 고민하다 '남산'이라고 정하고 거기 이름을 하나 써 넣었었죠그러니까 남산에서 만난 언니, 박은영 씨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해요. '사람을 찾습니.'라는 광고를 내는 심정으로 말이죠. 이 얘기를 어딘가에 해야 한다면 이곳, 듀게가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 전에 하게 됐어요조회 수가 높은 곳이고 어쩌면 언니도 저처럼 여기 와서같은 글을 읽고 호호 웃고, 영화평을 보며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금요일 늦은 오후 잠깐 짬을 내 올린 글로 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올해 제게 일어난 일 중 가장 중요하고 멋진 일이 될 것 같아요.

 

초등학교 육학년 때 저는 서울로 전학을 와요. 할머니, 할아버지와 시골 작은 마을에서 살다가, 어느 날 다니러 온 줄 알았던 아빠가 갑자기 저를 데려가겠다고 할아버지 앞에서 담담하게 말하던 그 날의 풍경을 지금도 눈앞에 세팅할 수 있을 정도로 세세하게 기억해요. 할아버지는 별 말씀 없으셨고 할머니는 우셨는데 저는 속으로 조용히 기뻤어요. 엄마, 아빠, 나이 어린 동생까지 모두 서울에서 살고 있던 터라 서울앓이를 아주 어릴 때부터 하며 자랐거든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서울에 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혼자 품곤 하였는데, 아빠는 아무 말이 없어서 줄곧 시무룩한 채로 어린 시절을 살았죠. 우리 집은 가난하지도 않았고교육열도 꽤나 높았는데 그 나이까지 시골 학교에서 별다른 사교육 없이 그렇게 지냈던 이유는 순전히  때문이었어요. '나 때문이다'라는 생각이 "저도 서울 가고 싶어요"라고 말을 늘 참게 했는데, 이게 가슴에 콕- 박혀서 병이 되고 있었어요. 기다림이 절망으로 넘어가기 직전, 그러니까 이제 막 삐뚤어지기 직전이었는데 막강권력자인 아빠가 '너의 서울 입성을 허하노라'하는 순간이었으니 기뻤죠. 마음 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순간마구마구 달리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누렁이랑 껑충껑충 뛰며 박수 치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어요.  

 

전학 가던 날,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어제 아빠가 왔고 오늘 전학 절차가 끝나서 바로 아빠를 따라 나서야했죠. 한 반에 스물다섯 명 남짓, 한 학년에 두 개 반이 전부인 작은 시골학교에서는 전교생이 서로서로 모두 친구고 언니고 동생이고 그래요아이 한 명이 입양도 아닌 전학을 가는데 교장 선생님이 교문까지 나와서 배웅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더구나 부반장이었어요. (남자아이들만 반장을 하던 시절이었죠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아이 하나가 책가방을 메고 논둑길을 지나가며,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면들에서 일을 하던 어른들이 허리를 펴고 보며 "오냐, 학교 가냐~"하고 인사를 받아주는 그런 마을에서 부반장을 한다는 건 큰 의미였어요. 어느 집 몇번 째 자식인지어느 해 무슨 병을 크게 앓았는지, 됨됨이가 어떠하고 공부는 얼마나 하는지 등등의 시시콜콜한 성장사까지 수집하는 그런 작은 지역사회에서 이 모든 궁금증을 단번에 대신하는 감투였던 셈이죠. "쟈가 즈그반 부반장이랴하면 어른들은 모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으니까요그런 제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학을 가는 거죠. 하하. 친구들이 모두 울었어요. 교생 선생님이 한달 오셨다가 가도 나라 잃은 백성처럼 전교생이 서럽게 울던 시절이었어요. 한 해에 태어났는데도 빠른 생일이어서 학년이 하나 위라고 어릴 때부터 저를 언니, 언니 하고 따랐던 사촌 동생 란이는 멀리까지 따라오며 "언니, 가지마아"하고 대성통곡을 했죠서울로 온 뒤로 한참 동안 담임선생님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학년이 바뀌어 란이의 담임을 맡게 된 선생님이 편지에 "란이가  자주 일기장에 '서울 간 언니 보고 싶다"라고 쓴단다"하셨죠

 

그렇게 서울에 왔죠. 서울로 전학을 왔어요. 갑작스럽게 말끔한 서울아이가 될 수는 없었지만 기죽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아이들은 제가 입만 열면 사투리를 쓴다고 웃어댔고, 치열하게도 쫓아다니며 놀려댔고하교 길에 골목길에서 기다리고 있다 저를 때렸고, 숙제 한 공책 페이지를 얇게 찢어서 제게 먹으라고 권했어요. 제 실내화 주머니를 뺏어서 남의 집 담장 안으로 던져 버리고 저희들끼리 웃으며 달아났어요. 해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그 집 앞에 앉아 있다 집에 와야했어요. 초인종을 누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는지. 초인종은 커녕 집집마다 모두 대문을 열어놓고 사는 동네에서 온, 저는 시골아이였으니까요. 저를 집요하게도 괴롭히던 그 녀석들 패거리를 만나지 않으려고 집과 가까운 후문 길을 놔두고 늘 큰길로만 다녔어요. '교문을 나서서 오른쪽으로 돌면 오락실과 문방구, 그 앞을 지날 땐 조심해야해. 그 녀석들을 만나면 다시 교문으로 들어가 한참 있다 나오는 게 안전해. 그 길을 빠져나와 다시 오른쪽으로 돌면 큰 길, 거기서부터는 어른들이 많으니까 그 녀석들을 만나도 눈만 마주치지 않으면 돼. 혹시 따라오면 어른들 곁에 바짝 붙어 가거나빨리 울어버리면 그만한참 걷다 작은 신호등을 건너고, 또 걷다 작은 신호등을 건너고, 또 걷다 제일 큰 신호등을 건너면 일단 안심. 녀석들은 이쪽 동네에 살지 않으니까. 오른쪽으로 돌아 한참 걷다 주유소와 빵집 사이 길로 들어가서 모퉁이만 돌면 우리 집성공!' 이런 나름의 안전지침을 마련하기도 했어요. 많이 힘들었어요. 한 반에 오십 명 남짓,  한 학년에 열반도 훨씬 넘게 있었던 그 큰 서울의 초등학교에 제 친구는 한명도 생길 것 같지 않았어요.

 

어느 초봄의 주말, 매일매일 바쁘던 아빠가 저를 데리고 봄맞이 서울구경을 시켜주시겠다고 해요어디를 갈까 며칠을 고민하던 아빠는 서울의 주요 나들이 코스를 모두 가기로 결정해요. 그러니까 하루에 말이에요. 저는 그 날 63빌딩도 가고, 서울대도 구경하고, 한강 유람선도 타고, 어린이 대공원도 가고, 롯데월드도 가고, 남산에서 케이블카도 타요. 이게 무슨 무한도전 멤버들 이동경로도 아니고, 올빼미 패키지 투어도 아니고, 지금 생각하면 아빠의 엉뚱함과 무모함에 웃음이 절로 나지만 그날은 정말 기뻤어요. 그러니까 바로 그 날 남산에서 은영이 언니를 만나요. 아빠와 저는 많이 지쳤고, 아빠가 남산 꼭대기에서 타임캡슐에 대해 말해주고 있을 때 어떤 이십대 초반의 예쁘장한 언니가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한손에 큼지막한 카메라를 하나 들고는 걸어와요. 아빠와 저는 동시에 언니를 봤어요언니는 아빠와 제게 망설임도 없고 사진 찍어 드릴까요? 라고 해요. 아빠는 허허- 웃고 저는 당황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무표정으로 일관해요. 언니가 제게 몇 살이니? 하고 물었어요저는 그때 열두 살. 초등학교 육학년시골의 작은 초등학교에서 부반장을 하다 서울로 와서는 일진을 먹는 녀석들에게 노예처럼 괴롭힘을 당하던 설운 열두 살언니는 서울에 와서 선생님 다음으로 내게 친절했던 사람.  천사처럼 웃던 '은영이 언니'를 그렇게 만났어요.

  

아빠는 그늘에 앉아 쉬고, 언니와 저는 근방을 돌며 사진을 찍어요. 언니는 제게 사진 찍는 법을 알려줘요. 찰칵하고 들리는 셔터소리가 제법 그럴싸하고, 뷰파인더 안으로 보이는 풍경이 그렇게 새롭고 신기할 수가 없었어요. 그날 언니에게 반셔터 누르는 법을 배우죠. 십자모양 초점계 상하가 또렷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셔터를 눌러요투박한 카메라였는데 어떤 종류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언니는 선하고 똑똑해 보였어요. 웃는 얼굴이었고 키가 조금 컸어요. 몸통은 호리호리했고 얼굴과 옷에서 좋은 향이 났어요. 그때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어떤 덩치 큰 남자가 우리 곁을 맴돌고 있는 걸 발견해요언니와 일행이었던 그 사람은 언니가 자기에게 토라져서는 어떤 꼬마아이와 개나리꽃 그늘 아래서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걸 지켜보고 있었던 거죠

 

요즘 저의 가장 큰 불안은 '갑자기 죽어지는 일'이에요. 생활이 단조로워지고 일에 대한 스트레스도 적응이 되고 나니, 어쩌면 나머지 인생에 있어 결정적 사건은 죽음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지게 되면 나는 어떻게 재해석될 것인가 하는 걱정에 이르게 된 거죠그리고 '당신의 컴퓨터 하드 디스크는 정리하고 오셨나요?'라는 일본의 어느 자살률 높다는 관광지에 내걸렸다던 현수막을 떠올리며 틈틈이 이것저것 정리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죽을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닌데 주변을 정리하는 일이 시간을 평화롭게 보내는 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잘 안 입는 옷은 정리해서 어디론가 보내고, 낡고 정든 신발들을 과감히 버리고, 다시 읽어도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노트들과 일기장도 버려요. 사적이거나 지우고 싶은 기억이 담긴 사진은 찢고 데이타도 삭제하고, 펜의 가짓수를 줄이고,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들을 편지로 쓰기 시작했어요그러다 오래 전 편지 박스를 발견했어요. 그곳에서 앞서 말한 란이 얘기를 써서 보내주신 선생님 편지도 발견하고, 광주에서 보내 온 은영이 언니 편지도 발견해요그 편지 박스 안에는 자주 잊고 살았던 사건들이 빼곡하게도 담겨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긴 글을 쓰게 하네요. 이건 언제쯤 지우게 될 얘기가 될까요.

 

그날 찍은 사진을 보내주느라 은영이 언니는 제게 사진과 엽서 한 장을 보내왔고, 저는 그 엽서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답장을 써요. 은영이 언니 덕분에 저는 평생 고마운 사진 한 장을 갖게 돼요. 열두 살, 아빠에게 비밀이 많던 그때, 사랑하는 아빠와 남산에서 꼭 닮은 표정과 포즈로 찍은 기념사진. 그 나이 때 아빠와 찍은 유일한 사진이에요. 그 날 남산에서 찍은 사진 속에 저는 미간을 찌푸리고 웃는 노력도 없이, 심지어 입술 한쪽을 살짝 깨물고 있는 표정도 모두 같아요겉옷 한쪽이 접혀 들어가 있는 것도 사진마다 모두 같죠. 제가 찍어 준 은영이 언니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요.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어요언니는 전라도 광주 사람이었고 그 남자는 충남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란 서울사람이라고 했어요한양대 의대를 졸업하고 군 복무 중에 언니와 결혼한 지 이 삼 개월 된 새신랑. 그러니까 남산에서는 부부싸움 중이었던 거죠. 언니는 광주시 용봉동 현대아파트에 살며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남편이 제대하면 서울에 와서 살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쓰여 있어요.

 

"... 난 광주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앞으로 서울에서 살 생각을 하면 겁이 난단다. 서울엔 엄마 아빠도 안 계시고 친구들도 없고... 하지만 아저씨가 있으니 괜찮겠지? 유실이도 있고. 광구 사람과 서울 사람이 어떻게 만났을까 궁금하지? 우린 아주 우연히 만났단다. 아저씨 말에 의하면 운명의 만남이지만. 새삼 그때 일을 글로 쓰려니까 쑥스러운데!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 해줄께. 유실이를 알게 된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유실이가 보내 준 편지 받고 언니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뭔 줄 아니? 지존무상 2 보는 것!"

 

저는 중학생이 됐고 밤 12시까지 부모님이 짜 놓은 학원스케줄에 시달리기 시작했고만화방에 갔다가 들켜서 아빠에게 눈물 쏙 빠지게 혼나기도 했고,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고그랜드북스 시리즈에 푹 빠져 있었어요저를 힘들게 했던 그 패거리들과도 초등학교 졸업하고 여중으로 오며 안-녕 할 수 있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서울 친구들이 생겨서 함께 극장에 가거나 비디오를 빌려보기 시작했어요홍콩영화에 한참 빠져 있었죠. 그리고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다 사람들 속에서 기절하는 사건 때문에 학교 근처로 이사도 왔어요그 뒤로 몇 번 더 편지를 주고받다 언니와는 이게 마지막 편지였던 것 같아요. 은영이 언니는 지존무상 봤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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