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팬이 아니지만 꼭 가야 할 것 같은 뮤지션들이 있습니다. 이를 테면 마돈나나 폴 매카트니 같은 뮤지션이죠. 딱히 힙합의 장르에 크게 관심이 없는 저에게는 에미넘도 그 카테고리에 포함됩니다. 단순히 팝팬의 관점에서 보게 되는 이런 공연들은 좋을 때도 있지만 실망스러울 때도 있죠. 올해의 최악의 공연 중에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 레이디가가 공연이었는데 규모만 컸던 준비가 부족했던 리허설 같은 공연이었죠. 우리나라가 첫 투어였기 때문에 야기된 일이었는데 이번 에미넘 투어도 금년 들어서는 미국 1회 일본 2회 공연 이후 처음이라고 하니 이런 의구심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는 없었죠.

 

2. 팬이 아닌지라 슬로터 하우스의 오프닝도 패스하고 7시 45분 쯤에 도착하여 뒷자리에서 느긋하게 기다립니다. 보조경기장은 앞뒤가 긴 공연장이라 무대가 꽤 멀어보이기는 했어요. 그래도 좌우 스크린의 크기가 컸고 습도가 높아서 사람들의 숲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는 않더군요. 공연시간은 예정된 8시를 넘어서 30분 정도 지연되었는데 저야 이럴 것을 예상하고 늦게 도착했지만 그래도 일요일 밤 시간인데 별다른 안내 방송 없이 지연되는 것은 좀 지루하긴 하더군요.

 

3. 8시 반에 불이 꺼지고 오프닝이 시작되었는데 에미넘이 2005년가 지난 이후로 은둔 생활을 하고 2012년 오늘 서울에서 그 오랜 은둔에서 드디어 벗어난다는 늬앙스의 자막을 보여주었는데 그럼 2010년도 발표한 리커버리 앨범은 뭐고 그 이후에 한 월드투어는 뭐일까 싶더라고요. 물론 월드 투어라는 말이 무색하게 공연 스케쥴이 띄엄뛰엄 잡혀 있기도 했지만요.

 

4. 리커버리 월드투어니까 기본적인 리커버리 투어 리스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텐데 사실 셋리스트가 그렇게 기억에 남지는 않아요. 공연 끝나고 작년의 셋리스트를 봤는데 정말 순서가 이랬던가 싶더라고요.  하여튼 초반의 에미넘은 그렇게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플로우가 기억속에 남아 있는 예리함과 리듬감을 담고 있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같이 듀엣을 해 준 레퍼의 기량이 더 좋게 느껴졌는데 사실 초반부 넘버들이 제가 좋아하는 곡들이 아니라서 그런지도. 킬유에서 비로소 에미넘 특유의 래핑을 반가워하기 시작했는데 단순히 제가 좋아했던 넘버였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5. 가장 반응이 좋았던 것은 깜짝 출연이 예상되었던 닥터드레와의 조인트 공연. 배틀하듯 서로 개인기를 뽐내는 래핑이 백미였던 듯. 라이터의 불을 켜라는 라이터스와 여성청자들은 소리 질러봐를 외치자 정말 엄청난 소프라노의 노도가 들리면서 곡이 시작된 러브 웨이즈 유 라이등이 특히 반응이 좋았죠.

 

6. 일본 공연의 반응이 화제가 되었지만 사실 에미넘의 공연이 미치도록 혼을 빼며 노는 공연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일본보단 세배는 잘논다를 실천하는 한국 청중답게 필요한 만큼의 리액션과 떼창 라이브는 보여주었어요. 그 수준이 어느 정도였냐면 에미넘이 수시로 하트를 머리위로 그리며 스크림 퍼킹 노이즈를 자꾸 외쳤던 정도?

 

7. 나의 젊음을 함께 했던 록스타들이 둥글이 햄스터같은 아저씨가 되어 돌아와서 다소 당혹스러웠다면 에미넘은 외양은 여전히 날카로운 청년의 외양을 하고 있어요. 우수가 여리면서도 예민해 보이는 눈빛은 여전하고 심지어 뱃살 조차 없더라고요. 다만 공연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어서인지 호흡이 긴 편은 아니었고 MIC질이 매우 빼어난 편은 아니라서 종종 음량이나 플로우가 고르지 못해 신기에 가까운 랩핑을 바라는 측면에서 기대 이상은 보여주지 못했는 듯.

 

8. 무대 조명이나 스크린의 영상은 월드투어 그것도 스타디움을 중심으로 하는 공연 구성치고는 허술한 편이에요. 밴드의 역량도 그다지 드러나는 일은 없어서 규모나 질량으로 압도당하는 느낌의 공연은 아니었다는 아쉬움이 있네요.

 

9. 그러나 낫 어프레이드나 루즈 유어셀프를 들으면서 추억에 젖지 않는 청중은 그 자리에 몇 되지 않았을 거예요. 사실 에미넘의 팬이 아닌 저로서도 루즈 유어셀프의 랩핑을 들으면 가사를 잘 몰라도 울컥하게 되는 무엇인가가 있어요. 이것이 단순히 음악을 좋아했던 젊은 시절의 회고인지 아니면 누구나 응어리를 갖고 삶의 아픔을 건드리는 리듬감을 이 음악이 갖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9. 그나저나 공연이 너무 짧아요. 본 공연이 70분이 채 되지 못하고 앵콜은 달랑 한곡이니까요. 올여름 록페 헤드라이너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정해진 공연 시간을 초과하며 자기 노래를 들려주었는가를 상기해 본다면 에미넘 공연의 짧은 공연 시간은 아쉬움만으로 남을 따름이었죠.

 

10. 그래도 저 외에 다른 에미넘 팬들은 대만족하고 돌아간 듯 싶어요.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이 에미넘 짱 멋지다 굉장하다를 연발하고 갔으니까요. 사실 몇가지 아쉬움을 토로하긴 했지만 에미넘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을 때 가지는 기대감을 만족시키는 공연이긴 했어요. 작년의 마룬 파이브 공연을 보고 난 뒤의 소감과 비슷한데 기대한 만큼의 에미넘을 확인 할 수 있었지만 기대를 넘어서 라이브의 즉흥적인 묘미를 충족시키지 못한 기성품 같은 공연이랄까.  저의 최고의 힙합 공연은 더루츠의 내한 공연이었고 이것은 록팬이 베이스가 되는 저의 편향된 관점이겠죠.

 

00. 공연이 끝나고 8Mile이 무지 보고 싶어졌어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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