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범죄들

2023.12.19 15:43

Sonny 조회 수:264

Crimes of the Future


영화를 본 지 좀 되었는데 후기를 못올렸네요. 일단 이 영화를 다 이해를 못해서 영화 끝나고 진행했던 지브이의 두 평론가님의 말들만 좀 곱씹어볼까 합니다. 모더레이터가 이 영화의 미쟝센에 대해 특기할만한 점을 질문하자 유운성 평론가와 김병규 평론가는 각각 답변을 했는데 그게 좀 흥미롭더군요.


유운성 평론가: [미래의 범죄들]에는 피가 튀거나 흥건하게 넘치는 장면이 거의 없다. 살을 째고 찢는데도 그 안에 담긴 피는 거의 표현되지 않는다. 크로넨버그의 다른 영화들도 그렇고 이 영화는 특히 건조한 느낌을 준다. 


-> 보면서도 생각을 못했던 부분입니다. 크로넨버그의 영화에는 피범벅이거나 피가 분수처럼 치솟는 그런 장면들은 거의 없습니다. 살덩이가 짓이겨지거나 찢어지거나 너덜너덜해지는 그런 장면들이 주를 이루죠. 그의 영화적 세계 안에 '육벽'은 있지만 그 안을 채우는 피는 없습니다. [미래의 범죄들]에서도 배를 가로로 갈랐다가 꿰맨 부분을 다시 뜯어내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에서도 피는 거의 안나옵니다. 크로넨버그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피주머니'로서의 육체가 아니라 단백질 덩어리로서의 육체인 것 같습니다.


크로넨버그는 리얼리즘을 포기하면서 왜 이런 식의 표현을 추구하는걸까요? 물론 앞서 말한 '건조한 느낌' 자체가 근원적인 목적일 수 있습니다. 저는 조금 다른 가능성을 상상해보게 됩니다. 덩어리에 액체가 섞여있으면 그건 쉽게 부패합니다. 그러니까 이 건조한 느낌 자체는 째거나 찢은 육체가 쉽게 상하지 않게 하려는 보존의 기능성을 위한 것입니다. [미래의 범죄들]에서는 아예 수술을 퍼포먼스로 하기 때문에 그 재료인 육체가 쉽게 상하면 안되겠지요. 동시에 메스로 몸을 가르고 안을 보여줄 때마다 피가 튀는 것은 좀 천박해보이기도 합니다. 원래 뭔가 가둬져있어야 하는 육체가 열리는 과정이 매번 피투성이가 되는 건 육체 자체보다도 피가 튀는 과정 자체에 신경을 분산시키는 것 같기도 합니다. 피가 덜 튀게 하면서 크로넨버그는 이 영화에서 육체를 상하지 않게 보존하고 조금 더 우아하게 덩어리들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미쟝센이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세계와 그 함의를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 살을 자르면 피가 나온다는 것은 살이 뭔가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표피와 내부, 표면과 진의, 기능적인 겉면과 존재 자체인 알맹이의 이분법적 세계관이 완성이 됩니다. 이걸 조금만 더 밀고 나가면 육체와 영혼, 육신과 생명 같은 이분법적 세계관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크로넨버그는 이런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육신이 더 중요하고 치명적인 뭔가의 주머니라는 개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생명이고 활력이며 소프트웨어인 것입니다. 무엇이 빠져나가거나 무엇이 담겨있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이미 생명덩어리라는 것이 크로넨버그의 세계관은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쇳덩어리와 육신을 자꾸 결합하려는 그의 영화적 실험들은 인간이 인간 아닌 다른 존재로 변모한다는 가능성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몸이 우리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몸이 변하면 존재 자체도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엔딩, 우리가 먹는 것과는 다른 무엇을 집어넣어서 소화를 시킬 수 있게 되는 이 육체적 변화는 기존의 '인간'이라는 관념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어나간다는 선언일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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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평론가: 크로넨버그는 육체의 변형이나 파괴 같은 가시적인 것으로 자신의 주제의식을 보여주는데 [미래의 범죄들]에서는 비가시적인 것들이 오히려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이 영화는 밖에서는 볼 수 없는 내장을 보여주는 것이 주된 소재인데, 주인공이 걸어갈 때 옆에서 나는 파리의 윙윙거리는 소리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이 볼 수 없는 목구멍 안에서의 작용들이 이 영화의 주요한 변화를 담고 있다.


이것도 평론가님의 해설을 듣고 나서야 되짚어본 부분이었습니다. 파리 소리가 날 때마다 저 육체는 혹시 썩은 건가... 하는 의심이 들곤 했거든요. 이렇게 해석을 할 경우 피가 보이지 않는 부분은 수술 퍼포먼스를 하는 측이나 그걸 즐기는 측에서 육체의 보존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맹신을 하고 있다는 뜻이고 사실 육체는 너무나 쉽게 상하는 것이라는 함의를 추가해서 봐야할 겁니다.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육체는 인간이 통제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지만 그게 안된다는 현실과의 괴리감에 시달리는 내용이기도 하니까요. 


김병규 평론가의 해설을 따라가면 저희가 보는 이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결국 가시적인 무엇입니다. 영화 말미에 나오는 아이의 시체를 해부하는 장면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우리는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전시할 수 있다는 그 믿음에 대한 반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마지막에 변화한 주인공의 육체를 또 다시 해부하고 전시하는 그 과정이 진실의 추구일지 아니면 덧없는 가시화의 투쟁일지 지금 당장은 좀 판단이 어렵네요. 


써놓고 보니 두 평론가의 해석이 상충하는 것처럼 적어놓았는데, 저는 그 두분의 지적이 독립된 지점으로 병렬되거나 혹은 동시에 존재하는 원리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의 또 다른 감상이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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