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자두씨를 삼켰어요.

2010.07.15 14:00

스팀밀크 조회 수:17112

며칠 전 오전, 아침을 먹지 못해 배고파하던 저는 자두 하나 먹겠냐는 권유에 한 치 망설이 없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자두를 받아 들었죠.

냠냠.. 아, 역시 여름에는 자두! 이러면서 열심히 먹다가 씨에 붙어있는 과육 마무리를 위해 입안에 넣고 사탕알 굴리듯 했는데,

정말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자두씨가 목구멍으로 쏙 빨려 들어가는 느낌.

크기가 있는지라 한 번에 매끄럽게 꿀꺽한 것은 아니었고, 순간 놀라서 저도 모르게 헉! 하며 숨을 들이마시며

뱉어낼 겨를과 정신도 없이 식도에 들어온 자두 씨를 크게 꿀꺽하며 힘들게 삼켰어요.

 

그리고 일단 목이 답답하니 앞에 있던 물을 벌컥벌컥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저 자두씨 삼켰어요. 켁켁" 라고 말한 후, 화장실로 뛰었죠.

저에게  자두를 줬던 사람은 씨를 삼켰다는 제 말에 놀라 함께 화장실로 뛰어왔지만,

이미 삼킨 자두씨를 다시 토해낸다는 게 쉽지는 않더라구요.

 

일단 자리에 돌아와 물을 좀 더 마셔보고, 가만히 자두씨의 크기와 지금 목 상태를 가늠해보는데

턱과 쇄골의 중간정도 되는 목부분에 불유쾌한 이물감과 약간의 통증이 10분, 20분이 지나도 그대로더군요.

일단 삼키긴 삼킨 것 같은데, 이런 뚜렷한 이물감은 또 뭐지 싶어 찜찜하길래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에 택시를 타고 이비인후과에 갔어요.

 

진찰실에서 마주한 의사선생님에게 자두씨를 삼켰다고 말하니 선생님 말하기를 "물 마실 수 있어요?"

"네 물 마시는 건 문제 없어요."

선생님은 쏘쿨한 목소리로 "그럼 넘어간 거예요. "

"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혹시나 해서요. 확실히 해두려구요."

"검사하는 게 어려운 건 아니니까, 저 쪽 의자에 앉으세요."

 

그리고는 잠시 후, 저는 난생 처음 타인의 손에 혀가 잡히는 굴욕을 당했어요.

의사 선생님이 혓바닥위에 거즈를 올려놓고 손으로 혀를 잡아 고정시키고 내시경으로 식도를 몇 초 동안 관찰하는 동안

저는 내내 높은음으로 "아~~~~~~레~레~레~레~레~" 소리를 내야했죠.

검사는 금방 끝났고, 결과에 따르면 역시나 자두씨는 이미 위속으로 퐁당한 상태.

친절히 내시경 영상을 보여주며 상처없이, 깨끗하다는 말을 듣고 끝.

 

진료비 계산을 위해 진찰실을 나서는 제 뒤로 들린 의사선생님의 목소리.

"근데, 자두씨가 컸어요?"

"음.. 좀 컸어요."

 

자두씨 때문에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를 열었는데, 열자마자 자두가 눈에 들어왔어요.

넌! 자두.

평소라면 아무런 망설이없이 냉큼 집어 먹었겠지만 불과 한, 두 시간 전의 공포가 떠오르며 못 먹겠더군요.

자두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된건지, 저 자두는 차마 내가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자두=무서운 것. 뭐 이런 공식이 오전 사이 새로 생겨난거죠.  

 

배가 출출해질 오후 느즈막한 시간. 냉장고 속 자두가 자꾸 떠오르며, 자두의 새콤달콤함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

결국, '두려움은 누구나 느낄 수 있어. 느끼는 거야. 당연해. 하지만 두려움을 극복하는 거야말로 중요하지.'

이렇게 스스로를 설득해가면서 자두를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

자두씨보다 강한 식탐이랄까요.  

 

 

그 후로 밤에 잠들 무렵까지 목구멍에서 느껴지는 이물감과, 침을 넘킬 때마다 좀 따끔거리는 느낌에 살짝 신경이 쓰였지만

내시경 영상까지 봤으니 자두씨의 행방을 의심할 이유는 더이상 없었죠.

 

다음 날.

전날 자두씨를 삼켰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이 제게 다가와 안부를 물으며 "근데 자두씨는 나왔어요?"

"아뇨, 아직."( 자두씨를 삼킨 후로 화장실을 안 갔으니까요.)"

"큰일이네~ 그거 크기도 크잖아요." 이러면서 손으로 복숭아 씨만한, 아니 그보다 더 커보이는 크기를 만들어 보여줬어요.

"그 정도 아니에요. 왜 겁주고 그래요.  이상한 것 물어보지 말고 저리 가요"

"걱정되서 그러죠 흐흐"

저를 놀리려고 그런 것 알지만, 속으로는 이미 자두씨 크기가 어땠었더라 열심히 회상.

 

그 다음 날.  

복숭아 씨만한 크기로 자두씨를 뻥튀겼던 사람이 다시 와서 웃으며 "괜찮아요?"

"아, 왜 그래요  T.T"-아직 화장실을 못 간 상태였거든요.  

 

그리고 자두씨를 삼킨지 사흘이 지난 오늘. 

이러다 내 장 어딘가에서 자두가 열릴 수도 있어. 라는 망상을 즐기게 될 쯤, 전 화장실을 갔죠.

그래서 오늘 오전 " 다 나았어요?" 라는 음흉한 말에

아무런 말 없이 여유있는 미소만 던지며 자리를 뜰 수 있었죠.

 

자두씨를 삼킨 후 애인이 '자두씨 그녀' 라는 별명을 붙여줬어요.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뭔가 아련함과 추억이 느껴질 법한 사기 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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