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의 불씨

2018.11.06 21:42

은밀한 생 조회 수:1802

커피콩 볶는 냄새와 같은 얘기 해볼까요.
잠들기 전 이불에 조금 뿌리는 향수 같은 얘기요,
뽀얗게 잘 마른 면 티셔츠에서 나는 햇빛 냄새 같은.

그런 무해무익한 찰나의 기쁨들.

다들 어떤 것들과 어떤 순간을 그렇게 느끼고 계시나요

저 먼저 주절주절해볼게요.

저는 일단 목소리에 굉장히 귀가 곤두서는 인간인데요, 식당에 갔을 때 옆자리에서 굉장한 데시벨로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 밥이 위로 들어가는지 테이블 아래로 굴러떨어지는지 경황이 없어질 정도로 목소리에 천착하는 인물이죠. 음성, 어조, 어투, 어휘, 발음, 모두에 민감해요. 흔히들 낭만적이고 설렌다 하는 중저음 목소리나 동굴 바리톤도 저에겐 소화가 어려운 목소리죠. 그런 굵직한 목소리는 너무 기름지거나 너무 흙맛이 나거든요. 이런 까닭에 제가 좋아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는 마음이 안정되고 미소가 피어나요. 목소리에 서늘한 음영이 드리워져 있고 종결 어미가 좀 아련하게 바스러지듯 끝나는 그런 말투에다가 어조에 변화가 거의 없으면서 조용하게 얘기하는데 딕션은 정확해서 귀에 부드럽게 꽂히지만 어쩐지 애틋한. 그런 목소리 있거든요. 저는 통화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편인데요, 사실 대부분의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통화를 기피하는 거예요. 저렇게 서늘하고 애틋한 목소리라면 그가 3시간 동안 얘기해도 가만히 귀를 기울일 수 있어요. 하지만 살면서 만나본 사람 중에 딱 두 명만 저 목소리를 가졌더라고요....

그리고 전 지하철을 타고 갈 때 그 면세점 상품권 꽂아놓는 아크릴 통 같은 게 있거든요. 가끔 거기다 천 원을 숨겨놔요. 처음엔 “이 천 원을 가져가는 당신, 오늘 하루 행운이 가득하기를” 뭐 이런 포스트잇을 붙일까 했는데요. 참 오글거린다 싶어서 관두고 그냥 천 원만 꽂아놔요. 아무튼 그곳에 천 원을 숨길 때 전 흐뭇합니다. 거창하게 봉사의 기쁨 어쩌고 아니고 그냥 어떤 고등학생이 가져가서 어묵이나 하나 사 먹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과 상상을 하면서 웃어요.

이건 좀 완벽하게 무용해서 도저히 못 쓰겠다 싶긴 한데.....음. 전 일하는 책상 위에 예쁘다 싶은 물병을 놓고. 그러니까 밀크티 병이나 그런 거요. 동그란 거 말고 위스키 병같이 생긴 거 있거든요, 그립감 좋은 걸로요. 그걸 깨끗하게 헹궈서 물을 담아놓고. 종종 흔든 다음에.... 그 병속의 맑은 물과 기포를 구경해요 ;;; 아주 작은 물방울들이 조용히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걸 바라보면 흐뭇해요. 그것들은 위에서 내려오기도 하고 아래에서 올라오기도 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지죠.

여러분에겐 어떤 기쁨의 순간이 있나요. 비밀 나눠주세요. 돈도 안 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런, 사사롭고 무해무익한 미소의 불씨들 말예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04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605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468
124864 광동십호와 후오호 [1] 돌도끼 2023.11.29 182
124863 슬로우 호시스 새 시즌이 시작되는 날 [3] LadyBird 2023.11.29 243
124862 이미지의 선동 - 남혐 손가락 자해공갈 사태 [4] Sonny 2023.11.29 589
124861 INFP에 대해 [1] catgotmy 2023.11.29 245
124860 잡담 여러가지 [1] ND 2023.11.29 245
124859 2030 엑스포 개최지 발표(최종 프레젠테이션 영상 후기) [1] 상수 2023.11.29 408
124858 [아마존프라임바낭] 세상에서 가장 재미 없는 여성 액션극, '너클걸' 잡담입니다 [11] 로이배티 2023.11.28 343
124857 인셀에 대해 catgotmy 2023.11.28 275
124856 프레임드 #627 [4] Lunagazer 2023.11.28 75
124855 대도왕오 돌도끼 2023.11.28 127
124854 유엔난민기구 UNHCR을 통해서 후원하는 것에 대한 갈등 [4] 산호초2010 2023.11.28 375
124853 영화전단지 안없어진답니다 [1] 돌도끼 2023.11.28 283
124852 [단독] 여자축구 이어 여자야구 예능 론칭..정근우·유희관 감코진 [2] daviddain 2023.11.28 212
124851 ISFJ에 대해 [3] catgotmy 2023.11.28 244
124850 잡담 - 청년이란 이름의 탈선 전차(은둔형 청년 50만명시대, 인셀화, 인터넷의 지나친 발달과 포르노산업) [4] 상수 2023.11.28 390
124849 [단독] 서용빈, LG 퓨처스팀 감독으로 7년 만의 컴백 [2] daviddain 2023.11.28 148
124848 Elliot Silverstein 1927 -2023 R.I.P. 조성용 2023.11.28 140
124847 "페미"를 창조하고 벌주기 [15] Sonny 2023.11.28 833
124846 [드라마바낭] 일본 호러의 파워 원천은 대체 무엇일까요. '토리하다' 잡담 [11] 로이배티 2023.11.28 417
124845 에피소드 #65 [2] Lunagazer 2023.11.27 7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