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막내동생은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기는 청년이에요. 언젠가 밤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별의 숫자보다 내 취미 쪽이 약간 더 많겠군.'이라고 근자감을 표출했을 정도니까요.
그 중에서 가장 즐기는 취미는 '누나에게 질문해대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시도 때도 없이 카톡으로 난데없는 질문 퍼붓기.'
어느 현자가 '두 사람의 관계에서 평화적으로 승자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질문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고 갈파한 바 있는데, 막내는 그 처세술을 완전히 체화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휴가 마지막 날, 이 게시판에서 추천받은 모 드라마 보기에 몰두해 있는 참인데, 띠링~
머저리> 어, 누나. 짧은 질문! 글은 정직하게 글쓴 사람을 반영한다고 생각해?
머저리 누나> 글쎄... 비교적 현재의 자신을 정확하게 보여주긴 하지.
머저리 누나> 글은 정직하기 어렵다든가 정직해야 한다는 건 윤리론이고, 모든 글은 이미 정직하다는 건 존재론이랄 수 있겠는데,
난 글의 존재론 쪽 손을 들어주는 입장이야.
머저리> 흠. 존재론 쪽이 더 너그러운 건가?
머저리 누나> 너그럽다기 보다는 더 넓게 생각하는 자의 윤리 아닐까. 아니, 윤리론적 시비의 계곡을 넘어선 뒤의 평원 같은 거랄까.
머저리> 흠.
머저리> 누난 내 글이나 말의 의견 개진 스타일이 불친절하다고 생각해?
머저리 누나> 질문의 요지가 뭐야?
머저리> 오늘 랩 친구 하나가 그러는거야. 내 설명은 표현의 측면에서 오해의 여지가 많다고.
머저리 누나> ?
머저리> 가령 이런 거야. 작업하던 중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곡을 듣게 되거든?
머저리> 오후 내내 그 선율이 귓가에 맴돌아서 친구에게 그 곡을 들어보라 권하고 이런 말을 붙이지.
머저리> '원래 슈만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추운 겨울 거리에서 듣는 슈만의 피아노 선율은 특별하다. 겨울 공기와 슈만은 아주 잘 어울린다.'
머저리 누나> 음.
머저리> 슈만을 특별히 좋아하진 않지만, 어느 순간엔 예외로 그의 뛰어난 점이 훅 들어온다는 점을 명백히 해두고 싶어서 그렇게 설명하는 거거든?
머저리> 근데 어떤 애에겐 그게 잘난 척하는 걸로 보이나봐. 표현만 있고 설명이 없다며 삐죽대더라고.
머저리 누나> 니가 슈만을 좋아하건 말건 친구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지. 사람들이 정작 관심을 갖는 건, 니가 슈만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인 법이거든.
머저리> 그러게 말야.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바보같지 뭐야.
머저리 누나> 설명과 표현은 분명 영역이 달라. 특히 듣고 읽는 사람에겐 그 경계가 꽤 유동적일 수 있을거야.
머저리> 유동적이라?
머저리 누나> 슈만의 음악을 아예 모르는 사람에겐, 슈만도 모르는 판에 겨울 오후의 거리에서 어쩌구저쩌구 하는 말은 자신의 무지만 오리무중으로 강화시키는 요령부득의 말로 들릴 수 있겠지?
머저리 누나> 즉 문외한에게 설명이 아닌 표현은 무의미할 수 있음.
머저리> 쫑긋
머저리 누나> 뭐 평소 슈만을 좋아해온 사람이라면 다르게 읽겠지.
머저리 누나> 그런 이는 슈만의 곡이 감정을 순화시키는 우아한 신호들로 충만해 있다는 걸 알고 있고,
따라서 그 리듬과 색채감 풍부한 화성법에 끌린 너의 예외성에 대한 코멘트가 설명 영역의 말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
머저리> 개인적인 표현이 누구에게나 쓸데없는 건 아닌거네?
머저리누나> 끄덕.
표현에 집착하는 입장도, 또 남의 표현을 과시나 과잉으로 보는 입장도,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함.
머저리>??
머저리 누나> 사람이 어떤 일을 하게되는 건, 욕구와 필요 ... 둘 중 하나에 의해서일 텐데
머저리 누나> 음악감상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지만,
어떤 음악을 듣느냐엔 욕구가 개입되는 거고, 다양한 문화의 층위에서 자기정체성- 고유성을 드러내려는 심리랄까... 그런 자연스런 욕구와 관련 있다고 봐.
그런데 필요(need)의 관점에서는 그런 욕구(desire)가 부차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척'으로 오해되기도 하는 것 같더라.
머저리> 흠. 잉여정보가 필요한 상황에서만 표현을 통해 그걸 제시하는 게 똘똘한 교류인 거네... 어렵다.
머저리 누나> 쉽지 않지.
마저리 누나> 그러니까 글을 쓸 때 부각의 대상이 슈만인지, 아니면 슈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 너 자신인지를 먼저 결정한 후에 글이든 말이든 하면 좋을거야.
머저리> 역시 슈만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한 멋진 문장 몇개가 필요한 거군.
머저리 누나> 듣고 읽는 쪽에선 설명해주는 글이 맥주 첫잔처럼 개운한 거니까.
머저리> 어렵다.
머저리 누나> 근데 열 사람 모두를 만족시키는 게 좋은 글/말은 아니지 뭐. 누구나 좋아하는 글/말은 유아의 재롱 같은 것 아닐까.
머저리> ㅋㅋ 위로가 되네.
머저리 누나> 복도 많지.
머저리> 그나저나 여행도 안 가고 일주일이나 집에 콕 박혀 뭐한 거야?
머저리 누나> 뭐... (우물쭈물)
머저리> 또 멍~ 병이 도진 건 알겠는데
머저리> 블레이크가 그랬거든? 그의 태도가 그의 운명을 만든다고.
머저리> 누난 그 나쁜 습관부터 고쳐야된다고 봐.
머저리> 빠빠이~
그가 폰 저너머로 빛처럼 빠르게 사라지자 (같잖아서 원~) 고요하던 가슴 속에 배 한 척이 뜨더군요. 그리움인 듯, 여운인 듯.
휴가 첫날 본가에 다녀온 후론 내내 폐인 모드로 방콕했던 일주일 저의 휴식 시간이 새삼 감격스러워 이제 축배 한잔 들어야겠습니다. 에취!
툭치면 후루룩 뭔가 나오니 재밌어서 자꾸 하시는 거 아닐까요 (질문해대기)
제 가족-친구들과의 카톡은 모두 단답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