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출장 후기에 적었 듯, NDSM 카페에서 제게 칵테일을 선물했던 미하엘이 던진 단어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서 일단 아우트라인이라도 그려봅니다.
제겐 한국어 포함, 어설프게 아는 외국어들 중에서 암호처럼 외우고 있는 개념어로서의 단어들이 있어요. 
그 중 하나가 'Rufmord'입니다. '중상모략을 통해 타인의 평판을 파괴한다, 혹은 타인을 살해한다'는 의미의 명사예요. 
중상모략이 과정과 행위에 초점을 맞춘 단어라면, 루프모르트는 그 결과까지를 나타내죠.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만 행위의 동기에 의도성이나 악의가 없었다면 모든 오해는 해결될 수 있다."고 어느 철학자가 말한 걸 기억합니다.
그런데 결코 선행이라 평가할 수 없는 행위에 대해, 그것이 악한 동기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보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증명 가능하다면 사람들은 그 동기의 성격, 즉 품성의 결여를 인정하거나 지성의 박약을 시인하는 일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할까요?

이 진퇴양난의 난제에서 가해자들을 구해내는 게, '후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후회는 논리 이상의 것이며, 자기애의 가장 순수한 형태죠.
그러나 루프모르트의 주체가 개인이 아니고 한 사회,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한 사회의 후회엔 한 세기 정도의 퇴보가 담보되는 거니까요.
(미하엘이 저 단어를 언급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게 요즘 한국 언론의 정치 뒤틀기였습니다.)

무교인 저에겐 "하와가 내게 사과를 먹으라고 시켰어요" 라는 아담의 말이 참으로 혐오스럽습니다.  
기독교 설화에서 인류의 기원으로 설정된 예수, 아담의 후예이기도 한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것은 아담의 저 근원적 비겁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만 같아요. -_-
타인의 실책을 볼 수 있는 건, 자기 마음 속 '악'의 시선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실책을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실책을 나의 것으로 이해 할 수밖에 없으므로 고통스러울 때, 비로소 '말'은 시작돼야 하는 게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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