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가정방문)

2023.04.21 19:42

thoma 조회 수:238

이 집의 구조는 기역자 한옥처럼 되어 있었지만 한옥도 아니고 양옥도 아니었던, 용어가 맞는지 모르겠으나 예전에 흔한 슬라브집?인가 그랬습니다. 방1, 부엌, 큰방, 큰방과 방2 사이엔 마루, 방2 이런 기역자였죠.

다른 가구가 없이 우리 가족만 살았는데 동네가 허름했고 집도 반듯함이나 튼튼함과는 거리가 있었어요. 하루는 하교하고 집에 오니 큰방의 장롱 윗부분이 튀어나와 있어요. 큰방의 윗목 쪽 천장이 내려앉아 수리를 해야 해서 농을 앞으로 당겨서 확인하고 다시 넣으려니 들어가질 않았다는 겁니다. 방바닥을 확보하기 위해 장롱을 밀긴 해야하고 그래서 윗부분을 당분간 튀어나와 있게 둘 거라는 겁니다. 장롱이 세로로 통짜로 된 것이 아니고 윗 부분이 이렇게 분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한편, 저는 이제 자라서 중3이 되었고 일요일에는 성당엘 열심히 나가고 있었어요. 교회 다녀본 분들은 경험이 다들 있으시겠지만 청소년기에 교회는 이성에 대한 눈을 틔우는 곳이기도 하지요. 조숙한 저는 중1 때 벌써 고2 짜리를 좋아한 경험이 있었어요. 그 고2는 자기 동기와 사귀고 있어서 저는 멀리서 보거나 왔다갔다 얼쩡거리다가 말았지만요. 2년 후 고2는 대1이 되었고 성당에서 중고생 담당 교사가 되었습니다. 내가 속한 반은 아니었지만요.

없어진지 오래 되었는데 학교에서 학년 초에 가정방문이란 걸 했었잖아요. 모르시나요...들어는 보셨겠지요. 여튼 했었습니다. 성당에서도 이걸 흉내내서 찾아갈거라고 예고를 했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집에 들어가니 부엌에서 할머니가 나오며 성당에서 선생님들이 왔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들'. 왜 이 사람들은 혼자 다니지 못하는가. 무섭나, 부끄럽나, 미안하나?? 할머니를 위해 아랫목은 비워두고 윗목에 상단이 튀어나온 장롱을 배경으로 내 담당 교사와 고2였다가 대1이 된 교사가 같이 앉아 있었습니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나네요. 뭐 별 내용이 아니었으니 생각이 안 나나 봅니다. 별 내용도 없는 얘기를 할 거면서 왜 찾아다니는 것일까요. 할머니가 주로 얘기를 주고 받은 거 같습니다. 나는 조금 뚱해 있었던 것 같아요. 고2였다가 대1이 된 그 교사에게서 이미 마음은 다 떠나 있었으니 조금만 뚱했지만 이 상황이 전혀 개의치 않은 것은 아니었어요. 이런 일들이 그렇듯이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어른들이 하는 짓 가운데 아주 불쾌한 일들 중 하나였음을 알게 됩니다. 


이 동네가 허름했다고 썼는데 이 얘길 조금 보태겠습니다. 우리 집은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왼편 7인가 8번 째 집이었어요. 이 골목의 오른 편엔 집이 없었습니다. 집이 아니고 하꼬방이 있었습니다. 일본어로 알고 있는데 판잣집이라고 하기에도 어설퍼서 하꼬방이 어울립니다. 입구는 우리 골목이 아니고 다음 골목 쪽에 있어서 어둠이 내린 후에 집을 향하다 보면 돌아앉은 하꼬방의 창으로 내부가 조금 보였습니다. 갓이 없는 알전구가 밝히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쪽 지대가 낮았는지 지붕이 내 머리를 크게 웃돌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일 년 후인가 다 철거가 되었고 거주자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글에서 느껴지시는지 모르겠는데 세상 모르던 시절을 지나면 슬슬 '집'이라는 게 아프고 힘든 얘기들의 실마리이자 풍성한 기억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고통의 축제가 되는 소굴이기도 한 것 같아요. 건물로서의 집, 가족이 사는 장소로서의 집, 애증으로 부대끼다 잠들곤 했던 집, 밤새워 공부했던 책상이 놓인 내 방.... 각자 떠난 집은 온갖 생각을 이끌어 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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