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에서 횡설수설

2019.04.28 09:02

어디로갈까 조회 수:980

과도한 일정 때문에 오히려 무기력해지는 상태와 대치 중인 나날입니다. 다양한 요구들이 서로 비벼대며 긴장을 만들어내는 통에 호텔 침대에서는 불면에 시달리다가 이동하는 차 안에서의 쪽잠으로 버티고 있어요. 피로조차 느낌이 아니라 생각에 가깝습니다. 위기감이 들 정도예요. 업무와 의식 사이에 섬이 있습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싯구의 '섬'과 같은 곳.)

근데 자동차 안에서 자는 잠이 의외로 달갑고 달콤해요. 조금 전, 잠 속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단다. 비오는 밤이면 외진 곳 어둠 아래 세워 둔 차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지. 빗물이 흐르며 내 팔에 무늬를 그렸고, 난 흐린 눈으로 그 무늬를 세면서 견뎠지. 장미의 벼락 아래서." 
그 음성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새벽마다 과천길을 달려 서울구치소로 갔던 해가 있었습니다. 그의 어깨에 항상 날 서 있던 그 외로운 긴장의 빛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요.

"감방에 있는 건 난데 니 얼굴이 왜 그러냐? 검은 상자가 막 마음 속을 굴러다니냐?
- ......
" 그런 상자가 닿지 않도록 속을 넓히려무나.
- 그러면 될까요?
" 물론이지. 세상을 보렴. 얼마나 넓어졌니? 아픈 사람들 덕분에. 사람들 아픈 덕분에.
누가 수감자이고 누가 면회자인지 구분 안 되던 대화들.  

쪽잠에서 깨어나면 '잘도 잤네' 혼잣말을 하며, 태연스레 일정을 검토하고 업무 계획을 점검합니다. 일이 무슨 퍼포먼스인 듯 일에 맞는 마음을 순간적으로 뚝딱 만들어 내요. 모로코에 도착하면서부터 틈틈이 감기약도(어린이 용) 먹고 있습니다. 자동차 내에서의 잠이 그렇듯 감기약도 제게 '섬'과 같은 적막한 안락함을 줘요. 때때로 기운이 솟구치면 살아 있다는 '실감'이 제게 묻죠.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거야?'
모노포닉한 문장으로 자신을 정리해서 그 '실감'에게 설명해줄 엄두가 안 나므로 저는 그저 빙긋 웃습니다. 웃음으로 '너의 질문에 합당한 대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서약하고픈 충동을 누르면서.

명료함이 아닌 불명료함과 복잡함을 목표로 할 때, 오히려 어떤 명료함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살아 있다는 '실감'조차 부분적인 것이고, 장소와 상황에 따라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단일한 실감이 허상임을 의식하는 것이 하나의 작은 출발점이 돼 왔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하나의 '고립된' 실감에 충실하자는 생각을, 마음이 잘 따라주질 않습니다. 이런 불가시의 노력들은 우울하든, 아니든 개인에겐 필수적인 일인 것일 테죠. 부동액과 엔진오일의 교환처럼. 

지금 제 가장 큰 바람은 어느날 아침, 시동이 걸리지 않는 차처럼 적막하게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따뜻한 봄의 끝에서, 이미 여름 준비를 마친 무성한 나무들 아래에서.


덧: 누가 한 말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모로코가 다리는 아프리카에, 가슴은 중동에, 머리는 유럽에 두고 있다, 는 표현에 대공감합니다.
덧2: 니체가 왜 '아프리카적'이라는 수사를 사용하며 해방구로 이곳을 상정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는데, 유럽을 벗어나고 싶은 엑소티즘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궁예질을... -_- 
덧3: 탕헤르, 라바트, 카사블랑카, 마라케시를 돌고 있는데, 모니카 벨루치를 닮은 이탈리아적 미인들이 참 많아요. 히잡도 선택 사항일 뿐이어서 전문직 여성들은 거의 안 쓰네요.
덧4: 알콜이 금지된 나라래서 위스키와 와인을 몇 병 싸왔는데, 곳곳에 알콜 전문 스토어가 있습니다. 맥주는 세계 모든 브랜드가 다 들어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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