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0 14:11
제목만 알고 있던 고전 소설에 대해 오해하고 지냈던 경우가 꽤 있습니다. 지난 번에 읽은 '분노의 포도'. 저는 이 '포도'를 오랫동안 포장도로로 알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이 분노해서 도로 점거라도 하나 보다...라고요. 확인한 결과 먹는 포도였는데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분노가 포도처럼 알알이 익어간다는 의미인가 봅니다. '포도'가 작품에는 특별히 등장한 기억이 없는데 이 과일이 성경 속에 자주 나온 걸로 봐서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번에 읽은 '목로주점'은 조금 다른 의미로 오해하고 있었어요. 저는 주인공이 주점을 운영하거나 종업원으로 일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 주점이 이야기의 배경이리라고 짐작해 왔습니다. 아니었어요. 주인공 제르베즈의 평생 직업은 세탁부입니다.
원제인 assommoir 는 '도살용 도끼, 선술집'이라는 뜻을 가지는 요즘은 잘 안 쓰는 프랑스어인 모양입니다. 우리말로는 '목로주점'이라는 제목으로 자리잡아서 어쩐지 낭만적인 느낌이 더해져 있네요. '선술집'이나 그냥 '술집' 같은 제목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의미가 아닌 어감상으로요. 이제는 '목로주점'이라는 제목이 고유명사로 자리잡은 듯해 어렵겠지요. 원제를 보면 중의적인 의미가 있네요. 술집이 분량상으로는 많이 차지하는 배경이 아니지만 이야기 전개의 중요성 면에서는 절대적입니다.
앞서 읽었던 '집구석들'도 공간이 중요했습니다. 브루조아들이 모여 사는 건물이 배경이면서 유기물과 같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며 계급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목로주점'도 공간이 중요합니다. 주인공의 흥망성쇠가 공간들로 표현되어 있었어요.
에밀 졸라는 총서를 시작할 때 발자크와의 차이를 말하며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나는 현대사회가 아닌 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타고난 유전적 기질이 환경에 의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역사적 배경과 직업, 거주 공간 등을 작품 환경으로 선택할 것이다. 나는 순수한 자연주의자이자 순수한 생리학자이고 싶다. 원칙(왕정, 종교)보다는 법칙(유전, 격세유전)에 근거한 글쓰기를 지향하고자 한다.'
인간을 표현할 때 이념과 이상으로 된 가치관이 주는 영향(원칙)보다는 타고난 유전적 요인과 직업, 주거 공간 같은 환경적 요인만을 살펴 쓰겠다는 뜻이겠습니다. 이것은 졸라의 인간관일 수도 있고 그에 따른 소설작법에서의 선택이겠으나 논란이 따랐다는 건 당연하게 보입니다. '목로주점'이 발표되고 졸라는 양측에서 다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보수 진영에선 문학과 병리학을 구분 못한다, 공화파로부터는 민중에 대한 경멸로 그들을 깎아내리는 인물이다, 라고요. 빅토르 위고조차도 '노동자들이 처한 비참하고 비천한 상처를 드러내 보여 세인의 구경거리로 전락시켰음은 유감스럽다.'고 했다네요. '목로주점'만을 보면 민중들의 삶에 희망이나 전망이 안 보이니까요. 애초에 그들은 가난을 대물림하며 교육도 못받고 술 한 잔의 위로만이 의지가 되는 일상인데 이를 그대로 전시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생각을 했겠습니다.
하지만 신문에 실리는 노동자들의 사건사고 조각 기사와 한 인물의 기복을 따라가는 긴 이야기는 역할과 파장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당시에 이 소설을 읽은 노동자들이라면 제르베즈의 성실함과 어리석음에 이입하고 분노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반면교사삼는데 어떤 설교보다 낫지 않았을까, 단순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들을 들러리로 다루지 않았고 그들 중 하나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귀했을 당시에 말입니다.
총 13장 중에 12장 후반 30페이지 정도는 제르베즈의 최악의 상태를 기술하는 부분인데 거리를 헤메다 가스등에 생긴 자신의 그림자를 보게 되는 장면은 잊히지 않습니다. 원래 다리를 살짝 절던 제르베즈는 나이들수록 몸이 불면서 다리를 심하게 절게 되는데 길바닥에 비친 그 그림자, 비대하고 땅딸막하고 흐느적거리며 텀블링이라도 하는 듯한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절망합니다. 굶주려서 눈오는 거리를 헤메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기 그림자를 보게 한 작가가 새삼 대단해 보였습니다.
아래는 세탁부 그림을 여럿 그렸던 드가의 작품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작품 활동을 했고 '세탁부'라는 소재를 공통으로 가지지만 드가와 졸라가 특별히 돈독하게 지내진 않았다는 걸 읽었습니다. 소재와 지향점, 이 둘은 다르니 그런가 싶어요. 그래도 소설 속의 제르베즈가 저런 복장을 했겠지라는 생각을 했고 옮겨 봅니다.
2023.06.10 14:15
2023.06.10 16:19
여성들의 움직이는 몸을 많이 그렸나 봅니다.
'나나'는 안 읽었지만 묘사가 끔찍한 건 모르겠고 상황이나 대응이 끔찍하고 답답하긴 했어요.
2023.06.10 16:22
움직임 그리고 정지된 순간의 긴장도
2023.06.10 15:04
마리아 셸이 제르베즈 역을 맡은 르네 클레망의 1956년 영화판도 있지요. 예전에 TV에서 이 흑백 영화를 보면서 소설에 묘사된 금발 미인 제르베즈로 마리아 셸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근데 소설이 강렬해서 그런지 영화는 별로 인상이 남지 않네요. IMBD의 사진들을 보니 제르베즈의 결혼식과 이후의 루브르 방문은 어렴풋이 생각나는군요. 술집에서 예전 동거남(이자 두 아이의 아빠)과 현 남편 사이에서 난처한 표정을 짓던 장면만 떠오릅니다.
2023.06.10 15:08
2023.06.10 15:10
마리아는 26년생이고 막시밀리안은 30년생이니 누나네요.
2023.06.10 15:12
2023.06.10 16:32
이분이군요. 어느 영화에서 봤는진 몰라도 안면이 있습니다. 영화의 원제목은 '제르베즈'였나 봅니다. 결혼식 후에 거리에서 비맞고 박물관 가는 장면 소설에서도 좀 특별했습니다.
2023.06.12 22:18
소설은 안읽어서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는 엔딩에 마리아 셸이 실성해요. 완전히 넋이 나가요.
잔상이 아직도 남아요. 얼마후에는 영화 <카라마초프 가의 형제들>을 보았어요.
아버지의 정부로 나오는데 전작의 이미지(?)가 있어서 몰입은 안되더군요.
.
2023.06.12 22:59
궁금하시면.. 옆에 흰글자로 적어 둘게요. → 남편이 실성해서 정신병원에서 죽은 이후 완전히 의지를 잃고 넋을 잃고 부랑녀가 되어 방에서 쫓겨난 이후로 기거하던 건물의 계단 밑 공간에서 주검으로 발견됩니다.
2023.06.13 00:40
감사합니다. 제 생각에는 영화 엔딩이 좋을거 같아요ㅠ.ㅠ
2023.06.10 18:16
2023.06.11 09:34
하루하루 몸담고 뭉게고 사는 것과 활자화 되어 있는 걸 보는 것은 달랐을 겁니다. 곁눈, 흐린 눈으로 보던 걸 까발려서 환한 데다가 꺼내놓으면 모두 당황하겠죠 ㅎ
2023.06.10 23:41
그러고보니 어렸을 때 '목로가 뭐지?'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사전을 찾아 볼 생각은 안 했네요.
수십년의 게으름을 이제사 구글 검색으로 참회해 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목로란 '주로 선술집에서 술잔을 놓기 위해서 쓰는, 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을 의미한다. 목로주점이란 '목로를 차려놓고 술을 파는 집'이란 뜻이다."
소설을 어려서 읽다가 때려 치운 후 다시 시도를 안 해봐서(...) 소설 속에 이 '목로'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말씀대로 '선술집'이라고 해도 아무 문제는 없을 것 같네요. 영화 취향과 마찬가지로 소설들도 지향성이 격하게 뚜렷한 작품들은 별로 안 좋아해서 (카프 작품들 한 번 읽어 보려고 결심했다가 며칠만에 때려 치운 젊은 시절 기억이... ㅋㅋ) 요 작품도 다시 시도는 안 해 볼 것 같으니 thoma님 글로 만족하겠습니다. 하하.
2023.06.11 09:44
선술집도 우리 식 술집은 아니지만 종종 쓰이는 표현이긴 한데 '목로주점'은 일상에서 안 쓰는 표현이라 일본 제목을 가져다 쓴 걸까 싶기도 하고 모르겠네요. 단어 설명만 보자면 현대식 bar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에밀 졸라의 책이 시작하면 읽게 되긴하지만 막 재밌어서 추천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매체가 부족했던 당대엔 자기들 세계를 보여 주는 큰 역할을 해서 히트작도 나오고 했겠으나... 요즘도 당시 사회상, 풍속 연구에 의미있는 참조로 많이 쓰인다고 하네요.
버호벤의 <캐피 티펠>평에 에밀 졸라같다는 평이 있었어요. 저는 김동인의 <감자>떠올렸는데 김동인도 자연주의 영향받았다니
어릴 적 들춰 본 <나나> 마지막의 그 시체썩는 장면 묘사가 너무 끔찍해 절대 졸라 책은 못 읽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