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7 06:00
성추행 사건이 일어나면 쉴드 중 하나로 꼭 등장하는 썰이 꽃에 나비와 벌이 찾아오듯, 남자가 여자를 만지고 싶은 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이 자연의 섭리가 없으면 인류는 망한다는(...) 이야기죠. 그냥 헛웃음만 나옵니다. 무식해서 용감하다는 점에서는 퀴어페스티벌 반대하는 개신교 신자들이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인형에 맞춰 발레를 춘 장면과 궤를 같이 합니다만.
1. 꽃은 여성이 아닙니다.
암꽃과 수꽃이 있는 종류도 있고 꽃 속에 암술, 수술이 같이 있는 종류도 있고, 암그루와 수그루가 따로 있는 종류도 있죠.
2. 벌과 나비는 남성이 아닙니다.
나비는 암컷, 수컷이 다 있고.. 결정적으로 꿀 모으러 다니는 벌은 전부 암컷입니다.
3. 나비와 벌이 있어야만 수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풍매화도 있고.. 또 타가수분이 안 되면 그냥 자가수분하는 꽃들이 많죠.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교훈도 없고 식상하고 상투적이고 게다가 사실관계도 안 맞고.. 대체 저런 비유는 왜 죽지도 않고 또 오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갑자기 이 생각을 떠올린 것은 무화과 때문이에요. 무화가를 먹다가 '아니, 얘네는 대체 어떻게 생식을 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생겼죠. 꽃들이 밖으로 안 보이고 밀폐되어 안에 숨어버리니까 무화과라고 부르는 건데, 그럼 늘상 자가수분 중에서도 자화수분만 가능하다는? 대대손손 유전자가 동일하게 유지되는 것인가? 늬들 이럴 거면 왜 유성생식하는 꽃으로 진화한 거니? 아아. 그래서 찾아봤더니 엄청난 과정이 숨어있지 뭐예요.
무화과는 무화과말벌이라는 작은 말벌이 꽃가루를 날라줍니다. 암컷 말벌이 자기 몸 속에는 정자를, 자기 몸 밖에는 무화과 꽃가루를 지닌 상태로 어린 무화과열매의 작은 입구로 기어들어가요. 무화과말벌에게만 특화된 좁은 입구라서 다른 곤충들은 못 들어오고, 암컷 말벌도 들어가면서 날개와 더듬이가 다 뜯겨가며 겨우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꽃봉오리마다 알을 까놓고 그 안에서 곧 죽습니다. 수컷말벌은 알에서 일찍 깨어나서 암컷 말벌들을 수정시키러 돌아다닙니다. 수컷 말벌들은 평생 무화과 밖으로 나갈 일이 없기 때문에 날개도 없고 교미 말고는 다른 기능이 없으므로 C자처럼 생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화과 밖으로 나가는 길을 뚫어놓고 죽습니다. 암컷 말벌은 무화과의 꽃가루가 성숙할 때쯤 다 자라서 나오면서 몸에 꽃가루를 묻히고 수컷들이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가서 다시 다른 무화과로 알을 낳으러 날아갑니다.
말벌이 무화과의 유전적 다양성을 책임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 파악하고 나니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말벌이 무화과 안에서 죽으면 우리가 무화과 먹을 때 모르고 말벌도 먹는 거야?
-저 암컷 말벌과 수컷 말벌들은 다 형제자매 아니야? 말벌이야말로 밀폐된 무화과 속에서 대대손손 유전자 풀이 변하지 않는 것인가?
-내가 먹는 무화과에는 구멍이 없었는데?
-수꽃이 열매(??)가 있어?
일단 우리가 시중에서 사먹는 common fig은 저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수정이 필요없는) 단위결실이라서 (달걀로 치면 무정란) 말벌이 전혀 없습니다. 한국에는 무화과말벌이 아예 없다고 하네요. 수정된 무화과가 더 맛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상업적으로 말벌과 숫나무를 도입했는데, 이 경우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무화과에서 피신이라는 효소를 분비해서 말벌을 전부 분해해서 흡수하기 때문이죠. 무화과 많이 먹으면 입이 아린 것도 이 소화효소 때문.. 무화과 먹다가 말벌 사체를 보게 될 일은 없다고 합니다.
암컷 수컷 말벌들은 형제자매들이 맞고 유전자 풀이 바뀌지 않은 상태로 세대를 반복하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한 무화과에 여러 암컷이 기어들어간 경우는 유전자 풀이 넓어지겠지만 이런 일이 얼마나 일어나는지는 모르겠어요.) 무화과는 말벌 덕에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했지만, 정작 말벌은 그걸 포기한 것이네요. 공생은 맞는데, 또 미묘한 긴장관계이기도 합니다. 무화과 수꽃과 암꽃은 겉으로 보기엔 똑같아요. 복불복으로 말벌이 수꽃에 들어가야 자기 알들을 낳아서 번식에 성공할 수 있고, 암꽃에 들어가면 번식 실패. 무화과 입장에서는 꽃가루 묻힌 말벌이 암꽃에 들어와야 꽃가루받이가 되고, 수꽃에 들어오면 남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것. 너의 성공은 곧 나의 실패인 관계죠.
수꽃과 암꽃이 똑같이 생겼고 수꽃도 열매가 생기는 이유는 사실 그게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육(열매)처럼 보이는 부분이 꽃받침이기 때문에 수꽃도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이죠.
무화과는 보존성이 매우 낮기 때문에 아주 맛있는 잘 익은 무화과는 산지에서만 먹을 수 있고, 특히 맛난 품종은 가는 동안 상해서 멀리서 파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시장에서 사먹는 무화과도 맛있게 잘 먹었는데 그보다 훨씬 맛있는 무화가가 있었을 줄이야!! 나무에게 잘 익은 무화과는 얼마나 맛있는 걸까요? '맛난 무화과를 산지에서 먹어보기'를 버킷 리스트에 넣었습니다.
덧. 기생충 스포 피해다니고 있는데 과연 극장에서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제가 있는 지역은 거의 전부 이 지역 말로 더빙(!!!!!)된 버전만 상영해요. 한국 배우들이 입을 달싹거릴 때마다 생경한 목소리로 생경한 언어가 울려퍼지는 것이죠. 아놔.. 제발 자막판 한 번만이라도 상영했으면.
2019.06.07 09:42
2019.06.07 20:01
생각할수록 경이로워요.
그리고 방금 딴 무화과 꼭 먹어보자구요!
2019.06.07 10:12
2019.06.07 19:58
동감입니다. ㅋㅋㅋ 동화 구연도 문제 많아요. 어리고 /작고 /초식동물은 여자 목소리(그리고 존댓말 씀) 어른이고 / 크고 / 육식동물은 남자 목소리 (반말 씀)
2019.06.07 10:45
저런 멘트를 쉴드용으로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1도 없습니다만, 정말 저 멘트가 성추행 쉴드 멘트로 반드시 등장하던 거 맞나요? 전 정말 그런 목적으로는 한번도 듣거나 본 적이 없어서요.
그리고 남녀를 벌과 꽃에 비유하는 건 그 자체가 생물학적으로 암수라서라기보다 서로 상호 관계의 특성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요?
아무도 진짜 배가 남자고 항구가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유행가 가사로 널리 통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2019.06.07 12:59
2019.06.07 13:57
발코니에서 기르는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열렸는데 그럼 이게 열매가 아닐 수도 있는 걸까요?
참 스페인에서 까미노 산티아고 걸을 때 길 가에 무화과 나무가 많았는데 그 때 따먹은 무화과가 제가 여태 먹어본 중 제일 맛있었던 것 같아요. 까미노 산티아고 가세요~
2019.06.07 20:04
까미노 꼭!! 기억해 두겠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태리에 맛난 무화과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일단 무화과는 '열매'는 아닙니다. 꽃받침이에요... 아무튼 무화과처럼 생긴 게 열렸다는 거죠? 그럼 무화과 맞을 거예요. 한 번 드셔 보세요. 밑져야 본전. (맛없을 가능성이 있지만 맛없는 게 해로운 건 아니니까요~) 드시고 댓글 부탁드립니다!!
야생 무화과는 일단 맛있을 확률이 매우매우 낮다고 (10만 분의 1?) 합니다. 사람들이 가꾸는 품종만 맛있대요.
2019.06.07 15:00
2019.06.07 20:10
2019.06.07 20:00
로그인하니 안 보이는 댓글 있네요. 로그아웃한 상태로 이미 봤으니 댓글 달아봅니다. 고장난 레코드처럼 맨날 나오는 소리거든요. 심지어 이런 시(?)까지 나오고 자빠졌어요.
미투(美鬪)
임보
진달래가 벌에게 당했다고 하니 민들레도 나비에게 당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매화 산수유 복숭아 살구 자두 들이 떼를 지어 ‘나두! 나두! 나두!’ 아우성을 쳤다
드디어 벌과 나비들이 얼굴을 싸쥐고 은둔에 들어갔다
그래서 그해 과일나무들은 열매를 못 달고 세상은 깊은 흉년에 빠졌다.
2019.06.07 23:54
2019.06.08 00:32
2019.06.10 20:32
이름만 말벌이고 아주 작아요..
저런 시 쓰는 자칭 시인들은 본인 뇌가 청정하다고 믿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구린내가 진동하죠.
2019.06.08 04:37
2019.06.10 20:36
그런 은유 보이면 그냥 그 작가는 영영 패스합니다. 세상에 읽을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꽃이라 안 드신다면... 브로콜리, 콜리플라워 등도 안 드시나요? 말벌 생각하면 좀 슬프고 오싹하지만 common fig은 그런 과정 없이 재배하는 것이라 하니 저는 그냥 먹으려고요. (그리고 미시적으로 보면 우리 몸과 미생물의 공생도 처참하거나 괴상한 부분이 있으니... 어떻든 피해가긴 어렵지 않을까.)
무화과나무가 마당에 있는 풍경이라니, 멋지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무화과 좋아하는데 잘익은 맛있는 무화과 산지에서 먹어보기.. 저도 버킷리스트에 넣어두려구요. 무화과 말벌들의 봉생이 참 경이로우면서도 단순하네요. 우리네 인생과 비교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