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추구하는 영화의 궁극적인 가치나 재미가 따로 있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은 영화를 소설의 영상판본이라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스토리라는 뼈대 위에서 벌어지는 액션활극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림이나 조형이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보고 어떤 사람들은 연극의 리얼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거대한 무언가가 무너지거나 터지는 규모의 미술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저는 영화를 '악몽'의 재현이라고 생각하고 꿈과 닮은 형태를 띄고 있을 때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꿈처럼 뒤죽박죽이거나 꿈 속으로 들어가는 영화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스즈키 세이준 감독은 이런 방면에서 다이쇼 로망 3부작으로 유명하더군요. 영자원에서 상영한 [아지랑이좌]를 놓쳐서 아쉬웠는데 아트나인에서 마침 기획전을 하길래 보고 왔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 영화를 보는데 많이 졸아서 뭐라고 딱 말할 수가 없네요. 아주 단편적인 감상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꿈을 꾸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보러가서 꿈만 실컷 꿔버린...


맨 처음에 [지고이네르바이젠]을 보다가 졸았을 때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컨디션도 썩 좋지 않았고, 영화도 난해했으니까요. 두번째로 [유메지]를 봤을 때는 눈에 부릅 힘을 주고 봤지만 또 수마의 습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지랑이좌]를 봤을 때는 정말 심하게 혼절하고 말았습니다. 감독의 스타일을 알고 각오를 했는데도 안되는 건 안되더군요. [유메지]를 볼 때부터 저만 조는 건지 곁눈질로 다른 관객들을 봤는데 역시나 다들 목이 꺾여있거나 진자 운동을 하고계시던... 저는 [유메지]를 볼 때부터는 괜히 우쭐해하면서 '저도 압니다... 많이 졸리시죠? 힘내시길...'하고 보다가 나중에서야 저 역시도 졸음의 피해자라는 걸 발견했습니다. [테넷]의 초반 장면 같기도 해서 좀 웃겼습니다. 이런 영화를 일부러 보러 오실 정도면 그래도 열정이 넘치는 분들일텐데... 객석은 꽉 찼는데 대부분 관객이 이렇게 조는 건 또 처음 봤습니다. 90년대 타르코프스키 기획전을 할 때 극장의 풍경이 대충 이랬을려나요 ㅋ


영화 세편 모두 각 평론가들의 해설을 들었지만 이거다 싶은 답을 얻진 못하겠더군요. 영화를 제대로 못봤으니 당연하기도 하고... 정성일 평론가님이 스즈키 세이준이란 감독에 대해 전반적으로 매핑을 해준 건 영화 자체와 아주 디테일한 관련은 없어서 어느 정도 이해를 구할 수는 있었습니다만. 그래서 세편을 다시 보려고 했는데 컨디션 문제와 스케쥴 문제가 겹쳐 결국 [아지랑이좌]만 한번 더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볼 때도 또 잤습니다. 웃기게도 지난 번에 보면서 졸았던 부분들에서는 다 깨어있었고, 지난 번에 깨어있었던 부분부터는 다시 잤습니다. 그래서 절묘하게 퍼즐처럼 합쳐진;;;;


그래도 부분적으로 기억에 남은 부분들을 좀 이야기해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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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이네르바이젠]은 스즈키 세이준 영화 중 제일 처음 봐서 그런지 정말 강렬했습니다. 뚝뚝 끊기는 편집이나 등장인물이 갑자기 여기에서 저기로 가있는 연출 하며 현실적인 제약이 없다는 듯이 유랑하는 주인공들이나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다른 캐릭터등... 초현실적이라는 걸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박찬욱이나 김지운이 좋아할법한 '불쾌감'이 작품 전체에 깔려있고 주인공들의 동기는 정확히 설명이 안되는데 그 와중에도 미쟝센들이 정말 화려하더군요. 갑자기 사라져버린 주인공과 그 주인공의 아내에게 유혹당하는 또 다른 주인공의 이상한 고민, 그리고 갑자기 현실이 뒤죽박죽 되어버린 것 같은 그 특유의 느낌을 이 작품에서 먼저 맛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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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가장 눈이 즐거웠던 작품을 꼽으라면 [유메지]를 뽑을 수 밖에 없습니다. 대놓고 꿈으로 시작하면서 붕 떠있는 느낌을 주는 이 영화는 꿈에서 깨어난 주인공 다케히사 유메지의 이상한 여행을 그립니다. 이 작품 역시도 다른 남성의 아내를 향한 욕망과 그림에 대한 창조욕을 그리고 있는데 그 안에서 노골적으로 타노스와 에로스가 뒤얽힙니다. 한 때 한국영화에 "개화기(일제강점기)"라는 시대가 유행이 된 적이 있는데 아마 서구의 문물과 한국 본토의 문화 충돌, 외부 세계의 압력과 그 안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안정 또는 불안을 추구하는 인물들의 갈등이 재미있어서 그랬던 걸까요. [유메지]에서도 그런 게 좀 엿보입니다. 양장을 입고 다니는 남성과 구식 기모노를 입고 다니는 남성이 명확히 구분되고 그 안에서 이들은 규칙을 알기 어려운 게임을 계속 합니다. 유메지가 어떤 여성의 남편을 찾아내서 그를 그 여성과 대면시킬 때부터 내용이 정말 종잡을 수 없어서 졸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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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서도 제일 많이 회자된 작품 [아지랑이좌]입니다. 저 장면의 끔찍한 배경화면만 봐도 이 작품이 품고 있는 에너지가 좀 느껴지지 않나요? 개인적으로는 마츠다 유사쿠를 처음으로 영화에서 만난 경험이라 좀 즐거웠습니다. 이 배우의 대표작은 형사물 같은 걸로 아는데 누아르 배우라는 인상과 다르게 [아지랑이좌]에서는 상당히 껄렁대면서도 실없는 모습을 많이 보여서 좀 재미있더군요. 시기상으로는 다이쇼 로망 3부작 중 중간에 있는 작품이지만 마지막에 봐서 그런지 이 영화가 뭔가 정점이자 최종결과물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또 다른 남성의 아내를 탐하고 죽음의 위험에 불안해하고 뭔가를 창조해내고싶은 남자 주인공의 정신적인 방황이 나옵니다. 아마 아련하고 붕떠있는 그 꿈 특유의 느낌이라면 이 작품이 제일 강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후반부의 연극 장면은 다시 봐도 졸 것 같습니다. 스토리 대신 온갖 상징과 개념으로 가득찬 씬이 계속 이어지는데 보고있자면 직관적인 감상 대신 해석을 하느라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로해집니다. 꽈리 열매를 뱉어내는 그 강렬한 장면이 끝인 줄 알았는데 뒤를 잇는 장면들은 다시 한번 그 강렬한 충격이 꿈처럼 흩어지는 감각을 줍니다. 뭔가 아주 이상하고 말도 안되는데 지독한 것을 보긴 봤다는, 그 희뿌연 느낌을 주려고 영화가 클라이맥스를 스스로 흩어버리는 게 희한하다고 느꼈습니다. 


졸아버릴 만큼 난해하고 어지러웠지만 또 꿈의 진행을 영화가 그대로 밟아나가는 것 같아서 즐거웠습니다. 현재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은 폭력적이면서 에로틱한, 일본 특유의 변태같은 것들이라는 걸 다시 깨우치고 말았네요.



나중에 영자원 도서관에서 스즈키 세이준의 작품들을 따로 볼 생각입니다. 감흥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다시 쫓아가는 수 밖에 없겠죠... 어떤 작품들인지 간략한 인상을 얻고 싶다면 위의 [유메지] 유튜브 링크를 클릭해보시면 됩니다. 저 영상은 중간을 생략해서 저렇게 난잡한 게 아니라 영화 전체가 그냥 난잡하고 혼란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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