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기차 여행 좋아하세요?

2019.06.25 04:49

어디로갈까 조회 수:1236

(지난 모로코 출장의 파트너 동료가, 알게 모르게 찍은 사진을 카톡에다 듬뿍 올려 놓은 걸 보노라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특히 기차 이동 시의 사진들을 보노라니 정서를 건드리는 부분이 있어서... ) 

기차 여행을 좋아하세요? 저는 좋아해요. 유럽의 철도체계만 그런 줄 알았는데 모로코의 시스템도 세밀했습니다. (예약이 안 되고 좌석 지정이 안 돼서 편리함과는 거리가 있음.)
기차가 발의 확장물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죠.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저는 밤기차 여행만은 망설이게 됐어요. 그건 기관사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왜냐하면 낮의 기차에서는 풍경을 통해 기차가 달리는 방향을 언제든 확인할 수 있지만, 밤기차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대부분의 승객이 잠들어 있는 객실, 창 밖을 주의깊게 살펴봤자 보이는 건 제 얼굴 뿐이거든요. 
   
특히 대낮처럼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Inter city 객실에선 더 그래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건 단일한 어둠과 그 위에 떠 있는 제 얼굴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저는 좀 무서운 느낌이 들더군요. 몇 시간씩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는 건, 나르키소스적 허영이 있는 사람에게도 버거운 일일 거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가장 불안한 건, 기차가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중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죠.
'나는 지금 어디를 지나고 있는 걸까? 혹시 이 기차는 궤도를 이탈하여 시베리아 벌판이나 몽골의 대평원을 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창 밖 저편에서 다른 기차 한 대가 나란히 달리는 경우도 있기는 해요.  방향도 같고, 속도도 비슷해서 창 너머에서 영원히 평행을 이루며 달려줄 것만 같죠. 하지만 역시 밤기차에서 확연히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얼굴 뿐이에요. 그 굳은 얼굴을 곁에 둔 채 한참을 가다보면, 두려운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들죠.
'창에 비치는 저 얼굴이 이렇게 영원히 나를 따라다니면 어떡하지? 기차에서 내린 후에도 끝끝내 저 얼굴이 곁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플랫폼에도, 택시 안에도, 호텔에까지도 따라오면 그때는 어떡하지? 生이 끝날 때까지 머리가 둘 달린 괴물처럼 그 모양이라면.....?'

언젠가 몹시 지친 상태에서 동유럽 업무를 볼 때였어요. 어느 날 밤기차의 식당 칸에서 맥주를 계속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싹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 잠시 후 날이 밝기 전에 이 기차는 어느 역엔가 도착하겠지. 난 그 낯선 역의 이름을 모르는데, 기차에서 내린 뒤 역에 써 있는 글자들을 하나도 알아볼 수 없을지도 몰라.'
알 수 없는 일이잖아요? 제 불안처럼 그 역의 모든 것이 기차 창 유리에 비친 제 얼굴처럼 거꾸로 되어 있을런지! 

친절한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야 하겠죠. 하지만 잊은 물건 없이 돌아가시라거나, 편안한 여행이 되길 바란다는 멘트 외에 도움이 되는 설명은 없는 법이죠. 승객들은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순순히 기차에서 내리고, 곧 기차는 떠나버려요. 그런데 그 역의 글자들은 창유리 저편 세계처럼 전부 거꾸로 되어 있으므로 저는 아무것도 해독할 수가 없는 거예요. 식당의 메뉴판이며 길 안내판도 읽어낼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나중에 만나는 친구의 얼굴도 창에 비친 듯 거꾸로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말할 것도 없이 기차로 여행하는 것은 편안하고 단순한 일이에요.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미 썼듯이, 창 이편의 세계와 저편의 세계라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거예요.  밤기차의 유리창 표면이 두 세계를 은밀히 가르고 있어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기관사가 거울 저편의 세계를 달리는 기차와 제가 탄 기차를 바꾸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떠나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태연하게  살아가는 것도, 실은 내가 아니라  밤기차의 창 저편 세계에서 온 다른 '나'라면요?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 저는 겁이 많은 사람은 아니에요. 그러나  밤기차를 탈 때면 언제나 긴장하게 됩니다. 특히 마지막 기차는 가능한 한 피하려고 노력하지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405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922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915
123637 [디즈니플러스] 애가 안 나오는 애들 영화, '레이더스' 잡담입니다 [22] 로이배티 2023.07.02 619
123636 [근조] 작가 안정효, 배우 박규채 [3] 영화처럼 2023.07.02 462
123635 영화 재밌게 보는 법 [1] catgotmy 2023.07.02 214
123634 [바낭] 내 걸 보고 싶으면 네 것부터 보여줘야지! - 웨스 앤더슨의 불가해한 여체 전시 [5] 스누피커피 2023.07.02 832
123633 intp entp intj entj catgotmy 2023.07.02 211
123632 프레임드 #478 [4] Lunagazer 2023.07.02 101
123631 오랜만에 만화잡지를 주문하고 상수 2023.07.02 209
123630 피프티피프티, 소속사 분쟁 [4] 메피스토 2023.07.02 743
123629 [영화바낭] 세기말 일제 호러 붐의 시작, '링'을 다시 봤습니다 [10] 로이배티 2023.07.02 465
123628 프레임드 #477 [4] Lunagazer 2023.07.01 121
123627 [넷플릭스] 마당이 있는 집, 잘 만든 건 알겠는데... [5] S.S.S. 2023.07.01 774
123626 [넷플릭스] 생각보다 재미있잖아?! ‘dc 타이탄’ 챕터1 [4] 쏘맥 2023.07.01 305
123625 디즈니플러스 가입했습니다 catgotmy 2023.07.01 181
123624 매해 7월 1일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영화 [1] 상수 2023.07.01 278
123623 인어공주 (1989) [5] catgotmy 2023.07.01 317
123622 R.I.P Alan Arkin(1934~2023) [6] 상수 2023.07.01 296
123621 주말 저녁에 붙이는 쇼츠 Taylor Swift , Lady Gaga, The Cranberries [2] soboo 2023.06.30 200
123620 갈티에 인종차별 구금으로 엔리케 파리 감독 부임 늦어질 수도 [4] daviddain 2023.06.30 180
123619 [티빙바낭] 클라이브 바커 원작 영화 중 최고점(?), '북 오브 블러드' 잡담입니다 [6] 로이배티 2023.06.30 348
123618 아이즈원 출신 솔로가수 최예나의 HATE XX 이야기 [2] 상수 2023.06.30 46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