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불안

2019.10.08 05:28

어디로갈까 조회 수:1068

1. 누군가 제게 상처를 주는데도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때, 그 이해에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괴로움의 얽힘이 생겨납니다. 깊고 캄캄한 틈이 발 밑에 열리는 것 같죠.
이 나이쯤 되니까 상처 자체는 별반 고통으로 작용하지 않는데, 그들에 대한 제 이해가 때로 몹시 벅찹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살 것 같았던, 그런 삶을 살고 있어요. 그러므로 잘 살고 있는 셈이죠. 아무렴 그렇고말고요~ 

2. 협화음 보다 멋진 것은 불협화음에서 협화음으로의 이행이에요. 그 과정에서 만나는 새로운 시야와 긴장의 해소가 마음을 잡아줍니다.
그런데 모든 불협화음이 다 그런 선물을 주는 것은 아니죠. 협화음을 필연적으로 추동하는 그런 불협화음이어야 해요.
아, 어쩌면 모든 불협화음 속에는 협화음으로 통하는 복도가 열려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어두운 단상일까요, 밝은 단상일까요.

3. 사람들이 닮은 것을 사랑하는지, 혹은 닮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물론 이런 의문은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것이죠.
사랑하기 위해선 닮지 않았음의 이격離隔이 필요하고, 다시 한번, 사랑하기 위해선 당신을 알겠다는 동일同一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러니 '사랑해줘'라고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든 있는 거죠. 왜냐하면 '넌 나이니까.' 왜냐하면 '넌 내가 아니니까.'

4. 퇴근길, 심란한 마음을 무시할 겸 필요한 문구류들이 있어서 대형서점엘 들렀습니다. 간김에 영화/미술 코너를 구경하고 있는데 어떤 파파할머니가  말을 건네왔어요.
"아가씨,  내가 이 나이에 연필스케치를 배우고 있어요. 도움이 될만한 책 좀 골라줄 수 있어요?"
얼굴에만 살짝 부기가 있을 뿐, 목소리도 카랑카랑 생기있고, 돋보기 없이도 글자들을 다 읽으시더군요. 건강해보이셨어요. 몇권 권해드렸더니 고맙다며 활짝 웃으시는데, 누군가의 이 글이 떠올랐습니다. "가장 깊은 것이 가장 맑은 것이다." (폴 발레리였나?)

5. 갑자기 책상에서 물러나, 현관문을 열고 어딘가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직 캄캄한 새벽이라 갈 곳이 없어요.  
5분 가량의 무작정 가출본능이 막무가내로 물결칩니다. 4분 분량의 궁리가, 3분 분량의 심호흡이, 2분 분량의 포기가, 1분 분량의 침묵이 지나갑니다. 자리에서 일어서,  뒤로 돌아...... 커피 한 잔을 만들어왔습니다. -_-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404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92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911
126316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VOD, OST 2곡 공개, 더 퍼스트 슬램덩크 디플 독점공개(예정), 신경끄기의 기술...이 필요하지만 신경끄기 어려운 현실 상수 2024.05.28 107
126315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6] 조성용 2024.05.28 383
126314 박병호 kt에 방출 요청 [2] daviddain 2024.05.28 162
126313 책 선물받았어요 [1] daviddain 2024.05.28 124
126312 침착맨 탄원서에 대해 [2] catgotmy 2024.05.28 493
126311 강아지 유치원 직원의 개 폭행사건 그리고 … [3] soboo 2024.05.27 463
126310 의사소통 혹은 관계의 진전 부치빅 2024.05.27 131
126309 연령별 한국 여성들의 취미 [4] ND 2024.05.27 548
126308 연령별 한국 남성들의 취미 [5] ND 2024.05.27 437
126307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 감독의 숏드라마 - 미래의 혼활 [2] 상수 2024.05.27 171
126306 엔팁에 대해 [3] catgotmy 2024.05.27 156
126305 강형욱 논란에서 이상한 점 [10] 딸기와플 2024.05.27 904
126304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의 덜알려졌지만 음미할만한 노래 추천 할게요. [1] jeremy 2024.05.27 95
126303 퓨리오사를 보기 가기 전 Fury Road를 복습했더니..(양영화 스포 포함) [4] Gervais 2024.05.27 279
126302 [애플티비] 살인자의 입을 열어야 살 수 있다. ‘블랙버드’ [4] 쏘맥 2024.05.27 171
126301 퓨리오사 짧은 감상 (스포) [4] skelington 2024.05.27 249
126300 취향과 사람들 catgotmy 2024.05.27 91
126299 에피소드 #91 [4] Lunagazer 2024.05.27 41
126298 프레임드 #808 [4] Lunagazer 2024.05.27 111
126297 '비버리 힐스 캅: 엑셀 F' 예고편 [2] LadyBird 2024.05.27 12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