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왕 연극 보고 왔습니다

2023.06.06 21:33

Sonny 조회 수: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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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을 제대로 보려고 읽은 희곡이었는데 때마침 이순재 배우가 리어왕으로 주연을 맡은 연극이 개봉했더군요. 이런 연극은 워낙에 표값이 비싼 관계로 프리뷰 할인을 받아 잽싸게 보고 왔습니다. 앞으로 당분간은 연극을 좀 자제해야할 것 같아요. 지출의 측면에서 새삼스레 뮤지컬 챙겨보시는 분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륙만원도 손이 덜덜 떨리면서 결제를 하는데 20만원 가까이 되는 표들은 어떻게 결제를 하시는지...


확실히 각본을 읽고 가니 연극을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제가 잘 모르고 대충 넘기던 부분들도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더 정확히 알게 되었구요. 이순재 배우의 리어왕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정적이고 군왕에 가까운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각본을 읽으면서 훨씬 더 흥분을 잘하고 막 날뛰는 이미지를 상상했거든요. 공연장에 가기 전에 잠깐 읽은 논문 내용과 이 연기스타일을 부합해보니 [리어왕]의 이야기는 단순히 불쌍한 아버지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다다랐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이면서 왕인 남자가, 딸에게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왕으로서" 요구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이 각본을 읽을 때에는 아버지로서의 배신감이나 비통함만을 떠올렸는데, 왕으로서 딸의 사랑을 요구하는 거라면 이순재 배우의 조금 더 무게있는 연기가 맞다는 해석도 해보았습니다.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며 무조건 따라야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코딜리어가 다소 심심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에도 크게 실망하는 대신에 어이없다는 듯이 굴었겠죠. 


이런 맥락에서 [리어왕]은 생각보다 복잡한 텍스트 같습니다. 특히나 군사부일체, 서양에서는 신과 군주를 일체화하는 믿음이 있는데 이것을 코딜리어를 통해 반박하고 있으니까요. 이건 단순히 아버지에게 아첨을 잘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이를테면 정철의 사미인곡 같은 것도 왕에 대한 충성심을 연인에 대한 그리움처럼 번역한 내용인데 이런 표현은 충성심이 연인간의 애정이나 부자간의 가족애처럼 번역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리어왕]은 그걸 딸을 통해서 직접 반박하는 거죠. 나는 당신을 딱 아버지로서만 사랑하지 무슨 하늘만큼 땅만큼 그렇게 사랑하지는 못한다는 코딜리어의 말은 애정의 셈이 정확해야한다는 철학을 깔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이야말로 진정한 애정의 표현이죠. 리어가 왕이든 아니든 코딜리어는 리어를 늘 아버지로서 사랑할테니까요. 신하로서의 충성과 딸로서의 애정은 그렇게 간단히 섞일 수 없는거죠. 리어왕이 딸들에게 자신에 대한 애정을 신하들 앞에서 증명하라고 하는 것만 봐도 이미 왕과 아버지의 자리를 헷갈린 자의 행동입니다. 


연극을 보면서 달리 깨달은 부분은 [리어왕]이 이중인격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각본으로만 읽었을 때에는 켄트가 어떻게 다시 리어왕의 부하가 되었는지 잘 와닿지 않았는데, 박용수 배우가 연기한 켄트 백작은 목소리 톤과 말투를 완전히 바꾸더군요. 재미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에드가가 미치광이 톰으로 변하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각본으로만 읽었을 때에는 뜬금없이 악마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헛소리만 해대서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데 이걸 김현균 배우의 연기로 보니 정말 굉장했습니다. 이 극에서 제일 미친 사람처럼 보였고 또 제일 소름끼치게 보였네요. 그러니까 리어왕의 옆에는 자기 정체를 숨기고 다른 사람인것처럼 연기하는 두 사람이 따라다니는데, 이 두 사람이 리어왕이 미치는, 다른 인격이 되는 과정의 예고편 같아서 또 흥미로웠달까요.


제가 제일 기대하고 봤던 광대 연기는 흠... 부녀간의 갈등이 세질려고 하면 끼어들어서 촐랑거리느라 일종의 소격효과를 준다는 건 알았지만 제 생각만큼 신나지는 않았습니다. 차라리 에드가가 훨씬 더 미치고 신나보였어요. 극에서 별로 튀어보이지 않던 오스왈드나 글로스터 백작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글로스터의 눈을 뽑는 장면은 꽤나 잔인하더군요. 너무 처참해서 이순재 배우의 리어왕이 겪는 고난이 좀 약해보일 정도...


주연인 이순재 배우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감흥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저만 그런가 했는데, 듀나님이 작년엔가 트윗으로 이순재 배우의 발성이 너무 발음이 씹힌다고 했더군요. 저도 딱 그렇게 느꼈거든요. 대사가 정확히 안들렸습니다. 마지막에 코딜리어의 죽음을 목격하며 크게 회개를 했는지,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리어왕]을 다른 극단 버젼으로 보고 싶더군요.


이번에 서송희 배우를 발견하게 되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둘째 딸 리건 역을 맡으신 분인데 제가 상상하는 이미지에 딱 부합하는 그런 연기를 해주셔서 대사를 칠 때마다 막 황홀해지더군요. 정확한 연기를 볼 때의 기쁨이 이런 것인가 싶었습니다. 이 배우가 나오는 다른 연극도 다 보고 싶더군요. 극 후반에 에드먼드를 유혹하는 연기를 하는데 에드먼드가 부러워서 혼났네요. 망할 자식!!!!!!!


좀 비싸긴 했지만 연기를 통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석하고 곱씹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제 셰익스피어의 다른 희곡들도 공연리스트에 올라오면 좋겠어요. 제발 안똔체홉 극장에서 보다 많은 극들을 공연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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