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과 사귀다

2019.12.16 05:41

어디로갈까 조회 수:627

어제 모 연구소의 새건물 준공식에 갔다가 계단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설치미술에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한 달여 정도 소요된 작품이라는데, 대하는 순간 영화<He loves me>에서 오드리 뚜뜨가 만든 캡슐 꼴라주가 생각나더군요. 물질의 홍수 속에서 점점 부서져가는 우리들 자아의 윤곽을 보는 듯도 했어요. 

예술가 중에는 동시대의 감성/감각에 천착하지 않고, 대중에게 발표하는 작품을 자아를 담는 그릇이라고(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미술이든 시든 음악이든 그런 이들의 작품은 제 경우, 독립적인 개인이 아닌 바다나 나무처럼 바라보게 됩니다. 알듯말듯한 비소통의 느낌도 좋고요.


동행자는 지혜로 착각되고 있는 인간의 탐욕이 느껴지지 않냐며, 유머러스한 컨셉에도 불구하고 밝지 않다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무튼 곰곰 감상해본 바, logical existence의 피로감이 있는 그 작품의 키워드는 하이브리드, 팬시, 미래주의인 것 같았습니다. 


- 하이브리드 Hybrid 

각각의 방향성을 지닌 개체들이 잡종으로 혼합된 것이 하이브리드일 것입니다. 기존의 방향성들을 상쇄하면서 새로운 의미가 나타나는 것. 그런데 하이브리드는 메시지 보다는 그 문법만 부각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아요. 미술 전공자가 아닌 저 같은 일반인의 눈에는 하이브리드라는 새로운 의미 자체가 모호하거나, 그 의미의 새로운 방향성이 한 눈에 읽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에게는 '하이브리드'에 대한 욕망이란 것이 존재하는 걸까요?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걸 다 이해하지 못해요. 이해를 못하는 채, 자의 없이도, 저 역시 이미 삶의 많은 디테일에서 하이브리드를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지만요. 뭐 꼭 소비가 아니더라도, 이미 저의 사고나 존재양식 자체가 문화적인 관점에서는 하이브리드적일 수밖에 없을 테죠. 


- 팬시 Fancy 

팬시는 우리에게 친근합니다. 하지만 정의내리기는 쉽지 않아요. 비현실적, 공상적, 환상적, 비자연적인 것이 밝게 발현되면 팬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으스스하거나 불길하거나 어두운 색채를 띨 때는 아마 그로테스크하거나 uncanny할 것이고요. 그러면 팬시는 낯익은 낯섦이면서 밝은 것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 미래주의 Futurism 

팬시와 하이브리드가 미래주의적인 면을 띨 때, 테크놀로지의 수단과 이미지를 동원하기 쉬운 것 같아요. 20세기 초반의 미래파와는 달리, 오늘날 미래전망을 긍정적으로 그려내는 세계관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장미빛 미래상보다는 암울한 미래상쪽이 훨씬 구체적으로 이미지화되기 쉬워서인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 설치작품은 예외에 속한다고 느꼈어요. 미래주의적인 팬시와 하이브리드가 어떤 구체적인 전망이나 메시지를 결여할 때, 그것은 좁아진 세계의 문화적 보편어의 문법원리로서만 부각됩니다. 


그 작품은 보편어로서의 하이브리드입니다. 그렇긴 해도 성찰의 여지가 없는, 굉장한 속도로 모든 순간 충돌하는 현상으로서의 하이브리드이고 보편 문법에 해당됩니다. 감상자들은 그 문법의 랑그로부터 개인의 파롤에 관한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그 건물에 머무는 동안 즉흥적으로 생각해 본 것은 이 정도입니다. 앞으로 이 점에 대해 공부하듯 계속 머릿속에서 어루만져 보고 싶지만 아는 게 별로 없으니 가능할런지. - - 


덧: 그 연구소는 사진촬영이 금지된 공간이라 작품을 카메라에 담지 못했어요. 분위기가 아래 작품을 떠올렸으므로 붙여봅니다. 

밀라노에서 근무하던 건물 로비 한쪽에 장식되어 있던 설치미술이에요. 

 intf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37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90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865
123622 R.I.P Alan Arkin(1934~2023) [6] 상수 2023.07.01 296
123621 주말 저녁에 붙이는 쇼츠 Taylor Swift , Lady Gaga, The Cranberries [2] soboo 2023.06.30 200
123620 갈티에 인종차별 구금으로 엔리케 파리 감독 부임 늦어질 수도 [4] daviddain 2023.06.30 180
123619 [티빙바낭] 클라이브 바커 원작 영화 중 최고점(?), '북 오브 블러드' 잡담입니다 [6] 로이배티 2023.06.30 347
123618 아이즈원 출신 솔로가수 최예나의 HATE XX 이야기 [2] 상수 2023.06.30 464
123617 참외 원래 이렇게 먹나요 [9] 가끔영화 2023.06.30 378
123616 애니 리버비츠 베니티 페어 할리우드 화보 모음(2010~23) [7] LadyBird 2023.06.30 299
123615 프레임드 #476 [2] Lunagazer 2023.06.30 94
123614 스타크래프트 1 이야기 - 프로토스 대 테란 입스타의 끝!! [6] Sonny 2023.06.30 329
123613 누구의 팔일까요? [4] 왜냐하면 2023.06.30 235
123612 아스날 옷 입은 하베르츠네 강아지들 [2] daviddain 2023.06.30 272
123611 듄: 파트 2 새 예고편 [1] 상수 2023.06.30 312
123610 [넷플릭스바낭] 배보다 배꼽이 큰, 블랙미러 시즌 6 잡담입니다 [12] 로이배티 2023.06.30 768
123609 프레임드 #475 [4] Lunagazer 2023.06.29 102
123608 인디아나 존스 봤어요 [2] 돌도끼 2023.06.29 404
123607 애니 리버비츠 베니티 페어 할리우드 화보 모음(1995~2008) [4] LadyBird 2023.06.29 308
123606 조상신에 대해 [7] catgotmy 2023.06.29 489
123605 이런저런 잡담... [3] 여은성 2023.06.29 374
123604 [티빙바낭] 이번엔 리메이크 버전 '이탈리안 잡' 잡담입니다 [10] 로이배티 2023.06.29 379
123603 프레임드 #474 [4] Lunagazer 2023.06.28 10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