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동생이 놀러온다

2020.01.11 18:12

Sonny 조회 수:1253

제 사촌동생이 저희 집에 놀러옵니다. 정확히는 롯데월드를 가고 싶어합니다. 저는 오히려 에버랜드를 더 가고싶은데, 일단 동생은 롯데월드가 더 구미가 땡기나 봅니다. 여차하면 다 가버려도 되겠죠. 놀이동산 가본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마치 그 때가 제 인생의 전성기 같아요. 그 때 정말 재밌게 놀았었는데. 싸이월드에 가보니 그 때 찍은 사진들이 되게 많더라구요. 유학생 신분으로 와서 겜방에서 알바하던 동숙이도 생각이 납니다... 사장님이 지어준 이름이라는데, 본인은 되게 좋아하던 한국이름이었어요. 툭하면 연습장에 동숙, 숙숙, 숙숙숙숙숙 하고 한글을 적어놓았던...


별 수 없이 저희 집에서 사촌동생을 재워야 합니다. 그런데 집이라는 게 참 묘한게, 저는 사귀는 사람이 있을 때도 저희 집에 데리고 가진 않았거든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럽고 누추해서... 뭔가 저의 가장 내밀한 내면이라는 느낌이 있어요. 이것 때문에 썸이 한번 박살난 적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먹고 자고 산다, 는 걸 보여주는 건데 야생동물이 자기 둥지를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어디까지나 저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저희 집이 아무리 내성적인 공간이라 해도 저는 얄짤없이 제 사촌동생을 재워야 합니다. 매트리스는 1인용이고 장판은 고장나서 안쓰고 있는데 당장 추우면 어떡하죠. 옷도 산더미같이 널부러져있고...


사실 돈만 더 있었으면 일본을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벌이가 시원치 않아서 ㅠ_0 그래도 제가 순수하게 뭘 베풀 수 있는 존재라서 전 제 사촌동생이랑 노는 게 좋습니다. 저는 어릴 때 형이 없어서 약간 심심한 느낌이었는데 제 사촌동생은 하필 또 외동입니다. 어쩔 때는 외롭겠죠. 안그래도 이번에 좀 노는 형들이랑 어울리다가 헛바람 들어갔다면서 고모가 속상해했는데 저한테 "좋은 형"의 책임이 주어졌네요. 부담스럽습니다만 끽해야 일박이일이니... 지난 번에는 겨울왕국2를 봤습니다. 그런데 그 땐 제가 좀 심란해서 제대로 놀아주질 못했어요. 이번엔 제가 딱히 힘을 안내도 놀이기구가 알아서 놀아주겠죠. 


어디 가서 뭘 먹여야 할까요? 롯데월드에서 홍대는 너무 멉니다. 그런데 건대는 또 데리고 가고 싶지 않네요. 뭔가 그 한국적인 분위기가 싫습니다. 별로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좀 "힙한 곳"을 데리고 가고 싶은데... 또 아웃백을 데리고 가긴 싫습니다. 그렇게 비싸진 않은데 예비고1 남학생이 오오 쩐다 하면서 감탄할만한 곳은 어디일까요. 역시 고기를 먹여야 합니까? 그렇다면 또 맛있는 고깃집은 어디가 있을 것이며... 그는 해산물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회를 안먹는 제가 매운탕이나 구운 생선을 먹을만한데는 또 어디 있을까요.


놀이동산 전과 후에는 뭘 할 것인가. 이것도 좀 고민입니다. 어딜 가도 좋아할 것 같긴 한데, 어지간하면 본인 고향에는 없을만한 그런 곳을 데리고 가고 싶습니다. 영등포 스타리움 관은 어떨려나요. 그런데 이런 것도 참...놀 줄 모르는 서울 비토박이 인간으로서 갖는 약점이네요. 전 서울을 잘 모릅니다. 어딜 가도 "무슨 극장 가러 와봤던 곳" 이라는 생각이나 하죠 ㅋㅋ 음, 좀 크고 분위기 좋은 까페는 어떨까요. 서울의 추위에 깜짝 놀랄 사촌동생을 데리고 오갈 곳이 마땅치가 않네요.


아마 재미있게 놀고 난 다음에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될 텐데, 제가 꼰대같이 굴까봐 걱정입니다. 최대한 대답은 자제하고 "그래?" 와 "호오~" 같은 리액션만 해주는 편인데 그래도 이 놈은 저랑 무슨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자기 엄빠는 잘 모르는 걸 저는 잘 안다고 생각하나봐요. 미안하지만 나도 롤 안해... 잘 몰라... 하기사 자기 엄빠한테 힙합전도사 할 일은 없으니까요. 작년 이맘때쯤 제가 "띵"이란 노래 쩌는데 누구냐고 물어보니 신이 나서 설명해줬거든요. 그런데 제가 추천한 BB는 또 안듣습니다. 망할 놈... BB 노래 좋은데.


가끔씩은 제가 <보이 후드>에서 이썬 호크 역을 맡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됐으면 좋겠죠. 그런데 이것도 참 편한 일입니다. 유사 아빠도 아니고 유사 삼촌 노릇이라니. 저야 아무 책임질 일 없이 하루 이틀 놀아주면 그만이지만 실질적으로 생계와 교육을 책임지는 엄빠에 대해서는 영 무심한 녀석이에요. 그래도 제가 어찌 감히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도 그랬던 것을. 그냥 이 내리사랑이 싸고 간편하게 먹힐 때 이 놈에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주고는 싶네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803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662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6757
111052 검찰 인사보복에 대해 비난할 수 있죠 [1] 도야지 2020.01.14 437
111051 누구나 ‘소울 푸드’ 하나씩은 있죠 [12] ssoboo 2020.01.14 1073
111050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 보았습니다 [24] 노리 2020.01.14 805
111049 If 2020's Oscar-nominated movie posters told the truth [2] 조성용 2020.01.14 435
111048 2020 오스카'로컬'영화상 후보작 발표중이네요. [7] 룽게 2020.01.13 799
111047 윤석열 대단하네요. [10] 졸려 2020.01.13 1564
111046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7] 조성용 2020.01.13 1189
111045 삼분 어묵 [17] 은밀한 생 2020.01.13 1029
111044 2020 Critics’ Choice Award Winners [1] 조성용 2020.01.13 461
111043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다가 - 강변의 남자들 [6] 어디로갈까 2020.01.13 701
111042 [넷플릭스바낭] 헤르미온느, 에단 호크 나오는 스릴러 '리그레션'을 봤어요 [10] 로이배티 2020.01.12 960
111041 윤석열 총장의 수사팀을 해체하지 말라는 청와대 청원이 진행 중이네요. [8] underground 2020.01.12 1108
111040 홍상수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봤어요 [12] 로이배티 2020.01.12 1370
111039 나다은이 자한당에 일으킨 작은 파문 [3] skelington 2020.01.12 1185
111038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I've loved you so long) & 컨택트 (arrival) [5] applegreent 2020.01.12 665
111037 멀쩡한 영화를 하나 봐야할 타이밍 같아서 본 '아워 바디' 잡담입니다 [6] 로이배티 2020.01.11 800
111036 [기생충] 미국 TV 시리즈화 설 [2] tomof 2020.01.11 941
111035 가십과 인권 사이 [17] Sonny 2020.01.11 1395
111034 “나는 네가 상상도 못할 이보다 더 허접한 것들도 봤지” - 스타워즈 (feat.스포) [10] skelington 2020.01.11 1160
» 사촌동생이 놀러온다 [18] Sonny 2020.01.11 125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