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서 수강신청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 수업이 영문학과 판타지란 수업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수업 첫날부터 "이 수업은 반지의 제왕 같은 분류의 판타지 문학을 배우는 게 아니고..."라고 말해서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뜨끔했죠. 그 수업이 가리키는 판타지는 리얼리티의 반대개념에 더 가까웠고 실재하지 않는 존재나 세계관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살펴보는게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드래곤이나 요정 같은 걸 먼저 떠올리기 쉬운 판타지는 시대에 따라 어둠 - 악마 - 또 다른 나 - 나도 타인도 모르는 인간의 무의식 이렇게 큰 구분을 했었는데 이 분류를 넘어서는 판타지 세계관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판타지의 대표사례가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입니다. 꿈이라는 세계에서 앨리스라는 소녀가 황당무계한 모험을 하는 이 이야기를 저는 이 수업을 들은 후 정독을 하면서 머릿속이 근질근질하고 귀여우면서 불쾌한 묘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앨리스가 단순한 개구쟁이가 아니라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심층을 헤집고 다닌다는 그 느낌이 너무 이상하게 다가왔었어요. (저는 그래서 디즈니의 실사판 앨리스가 정말 재미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데이빗 린치가 감독을 했어야한다고 생각해요.)

진정한 환상과 공포는 자기안에 존재한다는 이 규칙이 저한테는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제는 심리학 쪽에서는 거의 폐기되다시피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아직도 강렬하게 끌리는 거겠죠. 예전에 꿈의 해석을 정독하려 도전했지만 그 때마다 저는 몇페이지 못넘기고 번번히 제 자신의 꿈을 가지고 실습을 하고 말았습니다. 1년 365일에 500개 정도의 꿈을 꾸는 저에게도 텍스트를 읽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신분석학이 맞냐 안맞냐는 제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스타워즈의 핸드폰 없는 차원이동 우주선 같은 거라서 그냥 얼마나 근사하고 그럴싸한지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문제는 그 학문적 괴랄함을 부정하기 전에 이미 저는 정신분석학에 환장한 감독들의 영화들을 너무 많이 봤다는 것입니다. 데이빗 린치라든가 히치콕 같은 사람들의 영화는 정신분석학을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신분석학이 마법의 짱짱 학문이 아니라 그 영화 텍스트들이 애초에 정신분석학을 원전으로 삼아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학의 매력은 명쾌하게 떨어지지 않는 인물의 심리와 선택을 차근차근 조립해나가는 연역적 방황 그 자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싸이코>의 노먼 베이츠는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것인가? 미쳤다고 하면 끝이지만 씬의 디테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이드와 에고를 적용시켜보는 것은 아주 재미있어요.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창>인데, 이 남자주인공의 변태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정신분석학을 소환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습니다. 어제 정성일 평론가가 그러더군요. 살인범이 잠깐 나간 사이에, 자기의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여자친구를 그 위험한 살인범의 집에 보내고 그걸 멀리서 들여다보는 이 남자의 심리가 이해가 되냐고. 그 답이 비교적 구체적이고 길이 닫혀있지만 타셈 씽 감독의 <더 셀> 같은 작품도 아주 흥미롭죠. 그 영화가 정신분석학이 적용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인셉션> 같은 것은 많은 분들이 어려워하지만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정말 친절하게 다 뜯어서 풀어주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의 매력은 별로 없더군요.

최근 본 <데드 링거>도 그렇고, 인물들이 갑자기 이상해지고 집착과 불안에 시달리는 이런 내용들이 저는 너무 좋습니다.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렇게 굴고 그걸 카메라는 왜 그렇게 찍고 있는지, 그걸 그 해묵은 정신분석학을 끌고 와서 이야기할 때 신비를 파헤치는 기분이 들어요. 인간의 행동방식은 세상에서 가장 분해의 가치가 있는 탐구대상일지도 모릅니다. 그기 영화라는 장르에서 환상적으로 빚어질 때, 프로이드가 별의별 빻은 여성혐오적 소리를 했어도 그걸 참고 빠져들게 되는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페미니즘의 도전조차도 꽤나 흥미로운 과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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