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goes on

2020.12.19 11:08

어디로갈까 조회 수:985

# 고통스럽더라도 고통스런 포-즈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나 시간이 있습니다. 포-즈란 본질적으로 '멈춤'이죠. 그러니까 고통스런 포-즈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건 힘들어도 멈출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고통을 포함한 어떤 감각, 어떤 정서, 어떤 사유가 포-즈화되는 것이 허용되는 경우가 있어요. 바로 병원에 누워 팔에 주삿바늘을 꽂고 있을 때입니다.  

얽힌 실타래 같은 일들을 수습하느라 내내 허덕거리다가 어젠 출근도 못하고 기절해 있었습니다. (물만 마셔도 토했는데 나중엔 위액도 안 올라왔...  - - ) 결국 병원에 실려가 링거맞으며 누워 있던 중에 든 생각인데, 육신을 괴롭히는 것도 내가 나의 고유한 '모-드'를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포즈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건강과 병을 구분할 수 있을까?'라는 싯구를 읽은 적이 있어요. 건강과 병이 구분되지 않는 거라면  삶과 나도 구분되지 않는 것 아닌가? 건강에 대해 아이러니컬한 역할을 하는 병이란 것도 있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을 뻗어나가게 한 시였죠. 

일년에 몇 번 고요한 병실에 누워 팔에 주사 바늘을 꽂고 있노라면, 날 것 그대로의 시간에 눌려 마음이 흠칫 한 걸음 물러서는 걸 느낍니다.  빛과 어둠을 동시에 느끼면서 마음 어느 구석에도 진지한 겨룸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요. 그럴 때 듣는 시간의 기차소리는 춥고 불안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현란한 기억이 맹목적으로 포-즈의 집을 짓곤 해요. 동시에 이 포- 즈는 거짓이 아니라고 판단할 만큼의 삶에 대한 긍정이 아직 저에게 남아 있다는 느낌이 선명해지고요.

# 정맥혈관을 찾기 힘든 타입이라, 링거 한번 맞으려면 손등부터 팔목까지 여기저기 찔림을 당하곤 합니다. 알기로는 요즘은 초음파 유도로 정맥주사를 놓게 됐다던데, 어제 제가 간 병원은 옛방식을 고수하는 곳이라 오른팔이 붉고 푸른 멍으로 알록달록하네요.  (피부야, 꼭 이렇게 티를 내야만 했냐?)

고흐의 그림 중에 <프로방스의 추수>라는 남프랑스 배경의 그림이 있습니다. 사람의 피부처럼 보이는 대지를 그려냈기에 이 그림은 전문가들이 표면 연구로 삼고 있어요. 이 대지 그림으로 피부를 새롭게 성찰하는 연구가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피부란 사고의 대상으로 삼기가 힘든 부분이죠. 춤에서 안무 동작으로 종종 표출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득하기만 하고 잡기 힘든 주제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 피부라는 이 접경 지역을 들여다보고 생각해보고 심지어 만져보는 일은 의식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팔에 주삿바늘이 낸 꼬락서니를 보니 확실히 그렇다는 느낌입니다.

고흐의 그 그림을 통해서 피부를 다시 생각해본 시절이 있었습니다. 프로방스 지방의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 속에서 대지가 익어가는 것, 작물이 수확되고 그 수확되는 작품들이 펼쳐지고 다시 갈무리되는 정경이 한꺼번에 대지에 마치 그려지듯 묘사된 그 그림을 통해서요.  대지가 익어간다는 것을 작물들이 풍경 속에서 여과없이 고스란히 보여주는데, 그 익어가는 시간이야말로 피부의 시간이구나 깨닫고 공감했습니다.
 
피부의 시간이란 익어가는 시간이며, 늙어가는 시간입니다. 늙어간다는 것은 피부에 주름이 잡히는 시간인 동시에 그 시간이 복수화되는 것을 인정하는 각성인 거고요. 복수화된 시간 속에서 나이들어가고 익어간다는 것. 인간적 풍경 속에서 대지는 대지 그 자체의 법칙을 준엄하게 관철시키던 버릇을 잠시 유보하고 마치 피부를 가르쳐 주려는 듯이 다소 인간의 음성으로 말하는 듯합니다.  고흐에게 허락된 그 시간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풍요로움을 저도 알고 느껴보고 싶어요. 

자기 피부를 가만히 들여다본다는 건 보통의 행위는 아닙니다. 피부의 고차원을 꿰뚫어 보려는 것은 삶의 아득한 시간들을 겪는 것과 분리할 수 없는 거죠. 피부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농부일 수밖에 없다는 필요조건을 재확인시켜준달까요.  그 대지 위에 펼쳐지는 복수화된 시간들을 한꺼번에 꿰뚫어보기 쉽지 않습니다.
피부의 고차적인 결들의 배치, 결들의 무늬를 어떻게 간파할 수 있을까요?  그런 눈을 갖고 싶습니다. 그런 안목을 갖고 싶어요. 그런 눈을 갖고 펼쳐가는 행위들이 제 삶을 구성했으면 싶습니다. 고흐가 저 대지의, 저 바깥의 삶을, 자연의 삶을 뿌리치지 않고, 그저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눈을 하나 획득하는 일이라고 보여줬듯이, 저 자신에게 농부의 눈을 요청해도 되는 건지 자신은 없지만....

# 링거 맞는 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시 한 편이 불현듯 떠올라 코끝이 시큰거렸습니다. 

- 자화상 37년  / 김광섭

장미를 얻었다가
장미를 잃은 해

저기서 포성이 나고
여기서 방울이 돈다

힘도 아니요 절망도 아닌 것이
나의 하늘을 덮던 날

나는 하품하는
추근한 산호였다

아침에 나간 청춘이
저녁에 청춘을 잃고 돌아올 줄은 믿지 못한 일이었다

의사는 칼슘을 권했고
동무는 술을 따랐다
드디어 우수를 노래하여
익사 이전의 감정을 얻었다

초라한 붓을 들어 흰 조희에
니힐의 꽃을 담뿍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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