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년의 기다림' 잡담

2023.07.17 19:48

thoma 조회 수:452

405309e86dc2249a73044ecb26849ea6c0767497

우리 나라에선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말이 있잖아요. 현실 감각이 없어진다고 생각해서일까요. 저는 박완서의 소설에서도 이 대목을 읽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박완서였을 주인공이 어린이였을 때 너무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거나 이야기책을 밝히자 그의 할머니가 한 말이었나 그랬습니다. 박완서는 이후에 오래 현실 세계를 꾸려나가다 중년 이후 이야기꾼으로서의 길을 걷는데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생활을 하셔서 전쟁전후를 제외하면 가난하게 사시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인간사 큰 굴곡이 있어 마음의 고통은 많이 겪으셨지만요.


'3000년의 기다림'에선 위의 문장을 요렇게 고쳐야 되겠습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시청각적 이미지는 생략하고 그냥 드문드문 이상한(인상적인) 장면들 이야기를 두서없이 하려고 합니다. 내용도 다 포함되어 있고요. 


알리테아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는 것이 편했으며 그런 아이에게 흔하게 볼 수 있는 귀결로 책을 좋아했고, 공상의 친구도 있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친구에 대해 글로 기록하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글로 적을수록 그 존재는 점차 의심스럽고 유치하게 느껴졌고 결국 그렇게 의심받던 친구는 어린 알리테아의 인생에서 사라집니다. 병에서 나온 지니를 만나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 초반에 다짜고짜 '고백'할 것이 있다면서 어린 시절 현실의 결핍이 만들었던 그 보이지 않는 친구 얘기를 꺼냅니다. 이것이 왜 '고백'이 되어야 할까. 주의가 갔습니다. 마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상대에게 이전에 했던 사랑의 실패의 경험을 얘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다시 잘 사랑해 보고자 하는 사람의 이야기였고 그 사랑의 대상이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지니가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병에 들어갔다가 상대의 망각 때문에 또다시 갇힌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듣던 알리테아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당신도 나를 사랑해 달라,는 소원을 말합니다. 이 장면도 영화의 내용 전개상으로는 상당히 뜬금없이 느껴졌습니다. 알리테아와 지니 사이에 사랑이 생길 수 있는 사연도, 사건도 없으니까요. 그냥 호텔방에서 둘 다 목욕 가운을 걸치고 3000년에 걸친 지니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거든요. 지니의 이야기를 통해 계속해서 갖고 있던 내면의 요구(갈망)를 분명히 깨닫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이야기,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이야기가 주는 감동과 그것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상대의 망각으로 지니가 오랜 세월 병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 알리테아의 폐부를 찔렀을까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야기도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주변을 보면 생각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흔치 않은 것 같아요. 내가 이야기를 사랑한다면 나는 이야기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이 연인이 밤을 보낸 다음 아침 장면도 무척 이상합니다. 지니의 모습은 안 보이고(마치 목욕탕의 수증기에 가려서 그런 양) 행복해 하는 알리테아 혼자 허공을 보며 같이 런던에 가자 어쩌구 말합니다. 집으로 와서 지니와 지내며 알리테아는 일상 일을 하러 나갑니다. 학교에서 일처리도 하고 카페에서 혼자 식사도 하고 전철을 타고 돌아오고...등등. 그런데 이 장면들이 느리고 적적해 보입니다. 집에 연인이 기다리고 있다기엔 어울리지 않는, 언제나 지속되어 온 이전과 같은 일상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집에 오면 지니가 식탁 의자에 앉아 있어요. 이 부분을 보자니 영화의 정 중간에 나왔었던,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르고 모두의 망각 속에서 병에 갇혀 있던 외로움을 이야기 한 후에 '우린 누군가에게 진짜일 때만 존재합니다' 라고 한 지니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온갖 전파 공해로 인해 가끔씩 만나기로 하고 만남의 그 순간순간을 만끽하며, 죽기 전에는 함께 하겠다고 한 지니에게 알리테아는 충분해 합니다. 알리테아는 어릴 때와 달리 지니라는 존재를 의심하지 않고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있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마지막 장면의 둘은 무척 만족스러워 보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403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92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911
123975 다들 (애증의) 잼보리 콘서트 보시나요, 보세요 [4] 스누피커피 2023.08.11 591
123974 프레임드 #518 [4] Lunagazer 2023.08.11 82
123973 사람은 잠자는 상태가 기본이다란 말 무심하고 철학적이단 생각이 가끔영화 2023.08.11 244
123972 취화선 (2002) catgotmy 2023.08.11 142
123971 결론은 역시 게임만한게 없지! [4] skelington 2023.08.11 332
123970 던전 마스터 [2] 돌도끼 2023.08.11 130
123969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3] 조성용 2023.08.11 562
123968 [영화바낭] 무지막지한 제목의 압박!!! '귀여운 그녀들은 잔인한 킬러' 잡담입니다 [2] 로이배티 2023.08.10 379
123967 프레임드 #517 [2] Lunagazer 2023.08.10 86
123966 모리무라 세이치 작가가 돌아가셨군요. [2] thoma 2023.08.10 313
123965 R.I.P Sixto Rodriguez(1942-2023)(생몰년도 수정) [3] 상수 2023.08.10 219
123964 [왓챠바낭] 72년 묵은 영화를 봅니다. '괴물 디 오리지널' 잡담 [9] 로이배티 2023.08.09 466
123963 프레임드 #516 [4] Lunagazer 2023.08.09 102
123962 오늘도 안 조용한 잼버리 왜냐하면 2023.08.09 589
123961 Beau Is Afraid 후기가 없네요 [6] Gervais 2023.08.09 468
123960 인디락이라고 불리는 무언가를 사랑한다. [7] 위노나 2023.08.09 394
123959 올 여름 한국영화 대작 중 마지막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고나서(약 스포) [3] 상수 2023.08.09 771
123958 참 별일이야 [2] 가끔영화 2023.08.09 268
123957 [왓챠바낭] 괴작... 은 아니고 그냥 제가 스스로 낚인 영화. '블라인드 디텍티브' 잡담입니다 [6] 로이배티 2023.08.09 395
123956 [넷플릭스] 어둠 속의 미사, 우어어.... [7] S.S.S. 2023.08.08 46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