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나그네

2021.09.20 15:25

어디로갈까 조회 수:671

보스가 계획에 없던 작업 하나를 던져줘서 이 명절 휴일에 집에 못가고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한국의 고유한 축제일을 앞두고 제대로 발목 잡아준 보스에게 감읍하며 사흘 뒤까지 끝내야 하는 일이라 맥주 마시며 작업 중이에요. 칭다오는 제 입맛에 맞아서 오르는 혈압을 내려주는군요. 몇 달째 책상에 세 시간 이상을 앉아 있지 못하는 체력이 된 터라 하루에도 몇 번씩 침대에 십분쯤 눕는 걸로 버티고 있어요. 숨소리까지 들리는 이명현상 때문에 좀 괴롭기도 하고요. 

추석과 설날은 한국의 오랜 전통으로 내려온 축제일이지만, 못 만나던 가족들이 모여 한바탕 놀아보는 축제일이 아니라 성가시고 부담스러운 날이라는 의견이 대세가 되었죠. 단지 여성들에게 부엌일이 늘어나는 날로 인식되고 있고요. 
서구사회의 축제일은 즐겁게 노는 시간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근로/노동이 정지됩니다. 평소 억압되는 상태를 사는 인간들이 일년에 한두 번은 그렇게 해소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 명절에도 차례상 차리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인 것 같아요.

우리집은 몇년 전부터 아버지가  차례상을 차리지 말고 고궁 탐방이나 하며 명절을 즐기자라는 제의를 하는데,  어머니가 단호하게 거부하십니다.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조부모님, 시부모님에게 평소 안해 먹던 상차려서 인사드리고 싶다고요.
좀전에 아직 집에 못가고 있는 이유를 알리느라 어머니께 전화드렸더니 고자질하시네요. 아버지는 마늘 까고 쪽파 다듬느라 입이 일센티미쯤 나와 있고 막내는 다행히 이런저런 전 부치는 일을 재미있게 잘하고 있다고요. 두 남성 분이 제 몫이었을 일을 하면서 여성이 부엌에 갇히는 압박이 어떤 건지 제대로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호호

추석은 어떤 의미로든 어떤 감정으로든 어떤 성가심으로든 일년에 두 번 있는 명절의 시간입니다. 듀게님들, 집에 못 가는 제몫까지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흐르고 변하는 것들에게 치명적으로 상처받은 것들은 잠시 마음에서 내려놓으시고요. 해피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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