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스승의 날이었죠

2022.05.16 13:12

Sonny 조회 수:440

저는 대학 다닐 때 제가 굉장히 수업을 즐겁게 듣고 인격적으로도 흠모해마지않았던 교수님들이 있습니다. 전공을 가르치셨던 최모 교수님이나 백모 교수님, 그리고 그리스 문화를 가르치셨던 모 교수님 등... 제가 제 인생을 보다 성공적으로 꾸렸다면 이분들을 은사님이라 부르며 찾아뵙고 그랬을텐데 그런 방문이나 인사 자체가 엄두가 나지 않아서 늘 마음으로만 그리고 있네요.

나이가 들 수록 누군가에게 뭔가를 배운다는 건 커다란 특권이라는 걸 느낍니다. 이건 단지 수업료나 극진한 대우로만은 메꿀 수 없는, 인연의 문제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수강신청이라는 것도 인기가 좋은 교수님은 클릭전쟁을 해야하듯이 내가 어떤 좋은 사람을 만나 배움을 청하고 그걸 수용한다는 건 운이 포함된 일이 아닌가 싶죠. 학교를 졸업하고 경제적 책임을 스스로 지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제도적인 교육은 이제 업무교육이나 의무적인 것으로만 국한되게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정성일 평론가님을 뒤늦게 만나게 된 선생님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수강신청이 엄청나게 빡센 것도 사실이고 수업 내용 태반을 놓칠만큼 어려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존경할만한 어른에게 뭔가를 배운다는 건 저 자신이 퇴보하는 걸 막는 정신적 노화방지약을 먹는 것 같은 보람이 있습니다. 그건 단순히 뭘 더 알았다는 게 아니라 세상과 인간을 향한 태도의 수련에 더 가깝습니다.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이렇게 보면 안되는구나 하는...

이 참에 평론가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풀 겸 제가 왜 정성일 평론가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개인적인 썰을 좀 풀어보고 싶네요.

- 뻔한 프롤로그. 제가 정성일 평론가님을 지브이에서 처음 본 건 장률 감독의 <경주>를 영자원에서 상영 후 감독과 함께 대화나누던 자리였습니다. 그 때 한참 그런 관객과의 대화들을 찾아다니던 때였는데 정성일 평론가에 대해서는 사전정보가 거의 없었고 이름만 들었지 평론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에 그냥 호기심으로 갔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정말정말 지루했습니다!! 말 자체가 만연체인데다가 장황하고 심지어 혼자 말하는 시간도 너무 긴 겁니다. 한술 더떠 장률 감독은 허허 거리면서 뜬구름 잡는 소리만... 그런데 그 다음에도 기회가 있으면 해설을 들으러 갔습니다.

- 좀 오래되기도 했고 이제는 일상적으로 다녀서 잘 생각이 안나는데, 데이빗 린치의 <블루 벨벳> 해설에서 처음으로 재미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 알 수 없는 영화를 이렇게 세세히 뜯어놓다니! 하는 감동을 받았네요. 모던 시네마에서 가장 악명높은 영화인 <멀홀랜드 드라이브> 해설을 했을 때도 좀 감동받았던 것 같습니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를 '말이 안되는 영화'라고 하는 것도, 그 전제 하에 장면들을 건너뛰면서 수수께끼 같은 평을 늘어놓는 것도 정말 싫어했습니다 ㅋ) 이날 영화 두 편을 연달아 상영해서 네시간 반, 해설만 여섯시간 정도 해서 극장에 열시간 넘게 있었는데 진짜 장난 아니었습니다 ㅋㅋㅋㅋㅋ

- 제가 정성일 평론가님의 해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분이 늘 인간을 강조하기 때문이죠. 어떤 영화들을 해석하면서는 영화 테크닉 같은 거 하나도 소용없고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의 무엇을 이해하는지 그걸 담을 수만 있으면(그걸 담지 못하면 안) 된다고 격하게 주장하곤 합니다. 최근에 본 노웨어 스페셜이 그랬는데, 얼핏 보면 테크닉으로는 평이한 이 영화를 왜 굳이 해설을 하나 싶었지만 생각보다 깊게 들여다볼 지점이 대단히 많더군요. 어떤 영화는 어떤 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휴머니즘을 착취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어떤 영화들의 실패지점을 어떻게 지혜롭게 비껴나갔는지 이야기를 해주는데 그런 부분에서 영화를 더 예민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부작용으로는 사람이 울먹울먹할 때 아주 대놓고 줌인으로 그 사람 얼굴을 찍어대는 예능이나 티비프로를 좀 못보게 되었다는 거...?

- 초급자(?)들은 힘들 수도 있는데 조금만 적응이 되면 정성일 평론가님의 해설은 웃깁니다. 특히 한국 영화감독들을 까는 독한 개그는 제일 권위자라고 해도 될텐데, n모 감독과 k감독이 아주 많이 털렸죠ㅋㅋ 특정 영화에 대해서도 끼워넣기 식으로 깐 적이 있는데 '무슨 영화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다만 가족들과 함께 어떤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극장을 나서면서는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영화를 끝까지 본 내가 귀인이다!!' 현장에서 빵 터졌습니다. 그 외에도 신랄한 혹평개그(?)들은 있었지만 다 생각은 안나네요. 가끔씩은 본인이 재직중인 영화과 교수 모드가 되어서 너무 어설프거나 말도 안되는 답을 하거나 그런 영화를 만든 학생들에 대한 질타 정도??

- 좋아하는 한국 감독은 홍상수. '굉장하다' 는 수식어를 쓰는 동시에 어떤 해외감독의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에도 그와 비견될만한 감독의 예시로 많이 호출됩니다. 심지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이야기를 할 때도 비교대상으로 삼으셨죠. 박찬욱과 봉준호는 늘 기대주처럼 생각하시고 나머지 감독들은 고전영화 감독들 정도? 아, 장률 감독도 좋아합니다. 해외감독들은 너무 많아서...

쓰다보니 너무 길어지는군요. 일단 이쯤에서 급하게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주말을 통째로 정성일 평론가님에게 바쳤더니 힘들어 죽겠군요. 그래도 이미 또 예매해놓은 일정이 있으니 즐겁게 보러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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