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팔기> 읽고

2022.05.17 21:58

thoma 조회 수:317

<한눈팔기 道草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1915년 48세 연재.

道草 (미치쿠사)의 뜻 

1. 길 가의 풀   2. 길 가는 도중에 딴 짓으로 시간을 보냄


이 소설은 완성을 본 작가의 마지막 소설입니다. 이듬해 1916년 <명암> 연재 중에 사망했으니까요.

첫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쓰던 즈음을 소설 속 현재 시간으로 해서 가족, 친척, 양부모와의 관계를 과거부터 현재까지 더듬는 내용입니다. 

시간과 사건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 소설입니다. 제목을 저렇게 정한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 건 소설 업의 본격적인 목표가 아니고 길 가다 잠시 딴 짓 하는 것, 일종의 한눈팔기에 해당된다는 뜻이거나 동시에 본인의 개인사는 길가의 풀같이 흔하고 볼품없는 이야기라는 뜻이었을까요. 


주인공 겐조는 결혼 후 국비유학을 하고 돌아와 보니 처자를 의탁했던 처가는 몰락해 있습니다.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던 형네와 누나네는 시간이 갈수록 형편이 더 어려워지고 건강도 나빠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어요. 겐조는 교사 일을 하며 받는 돈을 쪼개서 누나에게 매달 조금의 용돈을 주고 돈이 필요하다는 장인에게 본인 지인에게 돈을 빌려 건네기도 하는 와중에 수십 년 인연을 끊었던 양부모까지 각자 찾아와 손을 벌립니다. 온 사방에서 돈, 돈 하는 것이죠. 머리가 좋아 서양 유학까지 다녀 왔으니 마음 먹으면 자신들이 필요한 돈 정도는 쉽게 벌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감정은 혐오감입니다. 특히 이 양부모라는 사람들에 대한 겐조의 혐오감은 참 처지 곤란한 감정입니다. 세 살부터 열 살까지 자신을 키워 주었는데 그때 그들이 겐조가 어리다고 아무 포장 없이 드러낸 추한 본성에 질려 있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안타까움과 현재 교육자로서의 체면으로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늙고 누추해졌으나 여전히 수치를 모르는 그들을 보며 조금만 착한 인간들이었으면 내가 슬플 수 있을 것인데, 라고 생각합니다. 깡마르고 쪼그라진 형이나 천식으로 헐떡이는 누나, 허영기 가득한 매형도 자신의 과거지만 불시에 현재의 문제가 될 수 있는 무언가 조잡함과 혐오스러움을 동반하며 배후에 존재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겐조 자신이 이룬 가정은 어떤가. 아내와도 관계가 원만치 않습니다. 아내가 입안의 혀처럼 굴어주면 좋겠는데 아내는 뻣뻣하고 오만하게 구는 겐조에 대한 불만을 안고 있고 대화할 이도 없어 그런지 히스테리 증상을 보입니다. 겐조의 옹졸한 성격이 현실의 갑갑스러움을 견디기 어려워지면 그 화가 아내에게 퍼부어질 때가 많습니다. 소설 속에 겐조가 집에서 가족들에게 얼마나 냉정하고 때로 폭력적, 폭군적으로 구는지 몇몇 문장이 있습니다만 독자인 제가 보기엔 어린 자녀 둘과 임신한 아내가 느꼈을 공포에 맞먹는 상세하고 가차 없는 묘사는 아니었어요. 나쓰메 소세키 위상으로 볼 때 당시 관점에서 보자면 스스로를 충분히 추하게 표현했다고 만족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잘 쓴 자연주의 소설로 칭송받은 작품인지도요. 제가 보기엔 관념적인 면에서 본인의 성격이나 심리를 혐오스럽게 표현하는 것은 잘 되었지만 실질적인 행위를 표현함에는 주저가 느껴졌어요.    

겐조는 자기 출신에서 탈출한 후에도 벗어나지지 않는 자기의 배경이 앞으로도 영영 벗어나질 수 없음을 자신이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에서 확인합니다. 


나쓰메 소세키가 양자로 갔다가 다시 본가로 되돌아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상세한 전후 사정은 이 소설로 알게 되었어요. 현암사의 이 책에 소세키 평전과 비교하는 주가 계속 나오는데 사실과 거의 부합하는 것 같았습니다. 소설에 보면 친가에는 위에 형들이 있어 겐조가 별 필요(?)가 없었고 양부모는 몸이 자라면 사환이든 뭐든 시켜서 자신들의 노후 대비를 할 심산입니다. 양부모 이혼과 재혼 등으로 다시 친가로 왔으나 아버지의 관심이나 애정은 받지 못하였고 사환 같은 것만은 안 되겠다고 되풀이 다짐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살 길을 공부에서 찾은 셈입니다. 세 살부터 열 살이면 참 중요한 시기인데, 순수하지 못한 목적을 가진 이들에게 양육되고 이후에는 친가의 무정함에 자신을 물건처럼 느꼈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20대부터 시작된 신경쇠약 증상과 중년 이후 늘 달고 살던 위염의 원인을 알 것 같았습니다. 이 위염은 결국 위궤양이 되고 질긴 고통을 주다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중에  <그 후>, <마음>을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후>는 비교적 최근에 다시 읽었더니 예전만큼 좋지는 않았습니다. 이것도 나이의 영향이라고 생각되었어요. 한량의 삶에 대한 매력이 줄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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