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호넷 The Green Hornet (2011)

2011.01.22 23:38

DJUNA 조회 수:15541

 

미국 수퍼영웅들은 대부분 만화책 출신이지만, 그린 호넷은 1930년대 라디오극 캐릭터로 탄생했습니다. 라디오 시대가 끝난 뒤에도 이 캐릭터는 용하게 살아남아 연재 영화, 만화책, 텔레비전 프로그램, 소설로 영역을 넓혀갔지요.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건 60년대 텔레비전 시리즈입니다. 이소룡이 이 시리즈의 카토 역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죠.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말씀드리겠는데, 오리지널 [그린 호넷] 시리즈는 결코 코미디가 아닙니다. 언론재벌이 가면을 쓰고 동양인 조수와 함께 악당들을 때려잡는다는 이야기이니 정말 진지할 수는 없죠. 하지만 적어도 그 설정 안에서 시리즈는 심각합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만 해도, 고의로 캠피한 매력을 풍겼던 [배트맨] 시리즈와는 달리 솔직하고 단순했습니다. 


이런 이미지가 대중의 상상력 속에서 슬슬 금이 간 건 아무래도 이소룡의 스타성이 당시 타이틀롤을 연기했던 밴 윌리엄스의 스타성을 훨씬 넘어서버렸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변했지요. 30년대만 해도 돈많은 백인남자가 동양인 조수의 도움을 받아 수퍼 영웅일을 하는 건 당연해보였습니다. 하지만 인종적 편견이 사라지고 이소룡의 스타파워가 더해지자 사람들은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린 호넷이 잘하는 게 뭐가 있지? 무술도 카토가 잘하고! 운전도 카토가 하고! 도대체 하는 게 없잖아!


세스 로건의 [그린 호넷] 프로젝트도 이런 의심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극도로 과장해요. 영화에서 그가 연기하는 그린 호넷/브릿 리드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멍청이입니다. 머리 나쁘고 몸도 둔하고 그렇다고 대단한 책임감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얼떨결에 신문사를 물려받은 뒤에도 생각이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차수리공인 카토가 천재적인 엔지니어에 무술의 달인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되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죠. 둘이 작당해서 수퍼영웅 팀을 구성하는 겁니다. 물론 중요한 건 카토가 다 합니다. 그가 하는 건 가면을 쓰고 폼 잡는 것밖에 없지요.


이건 척 봐도 패러디입니다. [그린 호넷]의 패러디이기도 하지만 수퍼영웅물 장르 전체의 패러디이기도 하지요. 그냥 패러디만 하는 게 아니라 거의 안티질을 하고 있어요. 이 영화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남는 캐릭터나 설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면 쓴 자경단 노릇? 바보 짓입니다. 가면 쓴 자경단? 바보입니다. 그들이 맞서는 악당? 그냥 뻔한 조폭입니다. 그 조폭이 어설프게 만화책 악당 흉내를 내려고 한다면? 그 때부터 그는 바보입니다. 그나마 카토는 살아남아야 농담이 유지되지 않겠냐고요? 아뇨. 영화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근거없는 짐작에 불과하지만, 주성치가 이 프로젝트의 주연/감독 자리를 떠났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이소룡의 뒤를 잇겠다는 마음으로 들어왔는데, 이런 각본을 들이밀면 하기가 싫겠죠.


결과는 무정부적인 파괴입니다. 패러디 농담을 망치처럼 휘두르며 원작에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때려부수었으니 남는 게 없지요. 캐릭터들은 공감하기 힘들거나 매력이 없거나 쓸모가 없습니다. 배우들 역시 역시 할 일이 많지 않은 건 마찬가지입니다. 세스 로건이나 주걸륜은 그래도 영화 내내 바보짓 거리가 떨어지지 않지만, 카메론 디아스나 크리스토퍼 발츠를 보고 있으면 왜 더 좋은 영화를 찾아 떠나지 않고 여기서 이러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허겁지겁 감독직을 물려받은 미셸 공드리는? 글쎄요. 그가 여기에서 무얼 더할 수 있었겠어요. 같이 망치를 들고 주변에 있는 것들을 때려부수는 수밖에.


이런 파괴를 재미있게 볼 수는 있을까요? 물론 있지요. 파괴에는 파괴의 쾌락이 있지요. 그리고 초딩 정신연령의 남자애들이 딱 초딩스러운 짓을 하는 걸 보며 "에라이, 이 덜 떨어진 놈들아!"라고 중얼거리는 걸 의미있는 영화적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저 같은 사람들도 조금은 있을 테니까. 전 이게 [찬란한 유산]의 이승기 캐릭터를 매력적인 어떤 것이라고 착각하며 몰입하는 것보다는 건전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 영화에 나오는 얼간이들은, 자기네들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무언가라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으니까요. (11/01/22)


★★


기타등등

이 영화에서 카토는 상하이 출신의 중국인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어차피 카토의 국적은 시리즈가 계속되면서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조금씩 바뀌었으니까요. 잠시 한국인인 적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지.


감독: Michel Gondry, 출연: Seth Rogen, Jay Chou, Cameron Diaz, Tom Wilkinson, Christoph Waltz, David Harbour, Edward James Olmos


IMDb http://www.imdb.com/title/tt0990407/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49725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65 런 Run (2020) [1] DJUNA 2020.11.28 4016
564 와일드 로즈 Wild Rose (2018) DJUNA 2019.10.29 4014
563 클로젯 (2020) [5] DJUNA 2020.01.30 4002
562 편지 The Letter (1940) [2] DJUNA 2015.06.26 3998
561 여름밤 (2016) DJUNA 2017.12.17 3996
560 더 웨일 The Whale (2022) [3] DJUNA 2023.03.06 3994
559 유령 (2023) [2] DJUNA 2023.01.18 3994
558 신이 되기는 어려워 Trudno byt bogom (2013) [1] DJUNA 2017.01.04 3978
557 화산고래 (2014) [1] DJUNA 2015.09.22 3976
556 캔 유 킵 어 시크릿? Can You Keep a Secret? (2019) DJUNA 2019.10.25 3962
555 푸난 Funan (2018) DJUNA 2018.10.23 3962
554 결백 (2020) [5] DJUNA 2020.06.05 3938
553 헌트 The Hunt (2020) [5] DJUNA 2020.04.30 3937
552 84번가의 연인 84 Charing Cross Road (1987) DJUNA 2017.12.12 3932
551 라비린스 Labyrinth (1986) DJUNA 2017.01.10 3931
550 조폐국 침입 프로젝트 Coin Heist (2017) DJUNA 2017.01.07 3931
549 눈발 (2016) [2] DJUNA 2017.03.04 392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