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에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틀어주어서 봤습니다

1920년대 아일랜드가 배경이지만 다루는 사건은 보편적입니다

당시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라고만 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체제에 반대해서 생긴 모든 단체는 외부의 적이 없어지면 

그 화살을 자기 안으로 돌릴 수밖에 없게 되니까요

영화에서도 데미안 역을 맡은 킬리언 머피가 이런 대사를 읊죠

무엇인가에 대항해서 싸우기는 쉽지만, 무엇인가를 위해서 싸우기는 어렵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데미안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진행됩니다

영화 안에서 데미안의 운명과 관련하여 중요한 세 개의 장면이 있습니다.

그 세 개의 장면들은 모두 죽음과 연결되어 있죠.

첫 장면에서 데미안은 영국군이 17살 소년을 죽이는 것을 보게 되지요.

병원이 있는 런던으로 가려던 데미안은 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아일랜드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형 테디가 이끄는 아일랜드 독립 운동 단체에 투신하게 되지요.



열심히 독립 운동을 하던 데미안은 두 번째 죽음과 마주합니다.

자신들의 행방에 대해서 밀고를 한 크리스를 자신의 손으로 처형하게 되죠

아이러니하게도 크리스도 영국군이 죽인 소년과 또래입니다. 사실 데미안 쪽이 더 끔직하죠.

영국군은 소년의 이름도 몰랐지만 데미안과 크리스는 서로 아는 사이였습니다

크리스는 죽기 전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의 마음을 계속 말하지요데미안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요. 

크리스를 죽이고 나서 데미안이 조국이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 라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뱉습니다

이 대사로 조금 눈치가 빠른 이들은 눈치를 챘겠죠

영국에서 아일랜드가 벗어난 뒤에 이어질 혼란을 버티지 못 할 데미안의 운명을요

데미안이 꿈꾸는 이상적인 조국이 그리 쉽게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요.



아일랜드는 협정을 통해 영국에서 벗어나지만 데미안이 보기에 그 협정은 반쪽짜리입니다

데미안은 자연스럽게 그 협정을 진두지휘한 테디와 날을 세우게 됩니다

사실 둘의 이념적 지향점은 같은 지점이었던 때가 없었습니다

영국이라는 외부의 커다란 적이 있어서 둘의 갈등은 가려진 채로 곯아가고 있었지요

이제 둘의 갈등은 터져 나옵니다. 테디를 따르는 쪽과 데미안을 따르는 쪽은 서로를 죽고 죽이기 시작합니다.

데미안이 맞이하는 세 번째 죽음은 자신의 죽음입니다. 테디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병사에게 총살을 당합니다

사실상 같은 편이었고, 자신과 평생을 보낸 테디에게 죽게 된 것이지요.



어떤 면만 보자면 데미안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과연 그럴까 의문이 듭니다. 제가 보기에 데미안은 신념이, 이상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조국을 가치 있는 것으로 믿은 데미안은 어긋난 모습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조국은 가치 있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자신이 한 일들을 정당화해야 하기 위해서는요. 

데미안은 자신이 믿었던 그대로를 끝까지 밀어 붙여야 했습니다.

협정 이후 그가 쓰는 글을 보고 형은 말하죠. 이런 걸 읽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글의 내용을 떠나서, 데미안은 글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데미안이 테디에게 무기가 있었던 장소를 끝까지 말하지 않은 것은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과 뜻을 같이 하던 댄이 죽고 난 후 회의를 느낀 것이겠죠.

댄이 죽는 장면은 절묘합니다. 무기를 찾으려는 쪽과 숨기려는 쪽이 분명 대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둘을 적으로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을 죽으려는 적인데 둘은 서로의 이름을 부릅니다.

데미안은 총을 들이밀고 있는 적에게 댄이 총에 맞았다고, 말하죠.

댄이 다쳤다고 이제 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적에게 할 수 있는 부탁이 아닙니다

자신을 아는 이에게 인정으로 호소하는 것이지요

마치 크리스가 죽기 전 데미안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요.

하지만 자신을 적으로 여기고 있는 이들에게 그런 말이 먹혀 들어갈 리는 없지요.

데미안 자신이 크리스를 끝내 처형한 것처럼요.



어쩌면 데미안은 그 때서야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어떤 이상에 잠식당했다는 것을요

이상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회의가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데미안은 댄이 죽고 나서야 앞서 말한 문장을 유서에 쓸 수 있게 됩니다

무엇인가에 대항해서 싸우기는 쉽지만, 무엇인가를 위해서 싸우기는 어렵다.

한 때 혁명투사였던 남자에게, 이제는 죽음을 목전에 둔 남자에게 듣는 이 고백은 

목표를 위해 싸우는 일의 어려움을 어렴풋이 보여줍니다.

거기에 더해 진정한 목표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도 합니다.

 


+

 


그런데, 데미안의 부인으로 나오는 시니드에 대해 아시는 분 있나요?

배우 이름이 올라 피츠제럴드라는데 위대한 개츠비를 쓴 그 유명한 피츠제럴드와 혈연 관계 인가요

활동을 많이 한 배우가 아니라서 자료가 별로 없네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09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632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574
64 EBS 고전극장 <애수> 제목만 들어도... [7] 김전일 2015.12.18 1395
63 습근평이 왔니? [9] 닥터슬럼프 2014.07.03 2459
62 동영상 촬영자 인생에 가장 길었을게 틀림없는 1분 [2] 데메킨 2014.06.14 2407
61 삼성전자가 백혈병 문제에 대해 사과했군요 [22] 로이배티 2014.05.14 4545
60 드라마 정도전, 50회가 끝이라는데 벌써 36회라는건. [6] chobo 2014.05.12 2746
» 뒤늦게 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스포 많아요) + 올라 피츠제럴드에 대해 아시는 분 있나요? [6] 사소 2013.11.17 1989
58 어제 월드컵 최종 예선전, 한국 VS 우즈벡. 한줄 관전평. [2] chobo 2013.06.12 1970
57 [바낭] 이 주의 아이돌 잡담 [12] 로이배티 2013.05.26 3454
56 2ne1 i love you 뮤비를 보며 수줍어하시는 분 [7] 닥호 2013.05.01 2517
55 로버트 패틴슨은 정상 남자 사람이었군요. [12] 쥬디 2013.03.25 6170
54 [게임잡담] 툼레이더 리부트 엔딩 소감 [14] 로이배티 2013.03.18 4205
53 금성무 (金城武) 좋아하시는 분 계시면 손! [23] OscarP 2013.03.17 3956
52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봤네요~ [8] 타르타르 2013.03.05 2208
51 (바낭)그저그런 연애와 결혼 이야기 [36] 엘시아 2013.02.18 5665
50 그러고 보면 mbc가 놀러와 대우를 참 안해주긴 했네요. [12] 자본주의의돼지 2012.12.28 4400
49 일베 망하는 소리 [33] 데메킨 2012.12.24 8196
48 민영화 어떻게든 하려고 들겁니다 [19] ML 2012.12.22 2835
47 내일 문재인이 당선될겁니다 [14] ML 2012.12.18 4011
46 [바낭] 슬픈 논개- 선거일 애인 유인 계획 [28] 부끄러워서 익명 2012.12.18 3013
45 (바낭) 듀나님 리뷰 보다가 너무 웃겨서..ㅋㅋㅋ [6] 사람 2012.11.23 329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