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몇 번 등장한 '며칠' 관련 글을 읽고 씁니다.

 

 

1
대표음가라고 해서, 한국어의 받침은 무조건 ㄱㄴㄷㄹㅁㅂㅇ, 이 7개의 음가만으로 발음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몇'이라는 글자는 [멷]이라고 발음이 돼요. 'ㅊ'은 받침으로서 대표음가가 'ㄷ'으로 치환되는 것입니다.

 

'10에 몇을 더하면 13이 될까?'에서 '몇을'은 [며츨]로 발음이 됩니다.

'을'이라는 조사는 무조건 앞의 명사와 결합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몇 일'의 경우는 '멷+일', 그러므로 [며딜]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중간에 사이시옷이 결합되는 경우라면 '멷+ㅅ+일' -> '멷+ㄴ+일' -> '면+ㄴ+일'이 되어 [면닐]이 되지요.

 

하지만 왜 '몇 일'은 [며딜]도 아니고 [면닐]도 아닌 [며칠]이라 발음되는 것일까?

이게 국립국어원에 계신 분들이 고민한 부분입니다. 아니, 도대체 왜?!

 


2
사실 '몇'이라는 글자 뒤에 붙는 명사가 'ㅇ'으로 시작되는 건 별로 없어요.

몇 개, 몇 시, 몇 사람, 몇 분... '몇+띄고+명사'의 형태에서 저 명사 부분이 'ㅇ'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있으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있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별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걸요? 그래서 '몇 일(혹은 '며칠')'과 '몇 월'이 굉장히 특이한 경우입니다.

 

순전히 제 상상일 뿐이지만, 저는 도리어 '몇 월'이 [며둴]로 발음되는 게 이상해 보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아마 이 '몇'이라는 것이 관형사가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 속에는 마치 접두어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굳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관형사'와 '접사'는 그 속성이 매우 다릅니다. 접사는 관형사와 다르게 무조건 명사에 들러붙어서 (뒤의 단어가 ㅇ으로 시작될 경우) 대표음가가 ㄷ으로 치환되지 않고 본래의 발음이 그대로 뒤의 명사에 달라붙기 때문이죠.

만약 제 상상이 맞다면 '몇 월'이 왜 [며둴]로 발음되느냐가 문제인데, 사실 이건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뒤의 '월'은 이중모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중모음에 ㅊ이 붙어 'ㅊ+월'이라고 해서 '춸'... 발음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듣기도 그렇게 좋지 않군요.

 

('몇 년', '몇 시', '몇 분' 같은 경우는 뒤의 명사가 ㅇ으로 시작되지 않아 관형사로 보든 접사로 보든 발음은 똑같기 때문에 뭐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 경우 ㅊ받침은 무조건 ㄷ 소리로 치환될 수밖에 없거든요.)

 


3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 국립국어원이라는 집단의 그 광적인 결벽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리나는 대로 적는다'에 너무 광적인 집착을 하는 이 집단은 '몇 일'이 [며칠]로 발음되는 예외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웃기게도 2인칭 대명사이며 [니]라고 발음되는 건 무조건 '네'라고 쓰라고 하며 다들 [비지니스]라고 하는 영단어는 무조건 '비즈니스'라고 써야 한다고 못을 박는 이중성을 보입니다.

 

('짜장면' 같은 예시는 여기서 좀 뺄게요. 사실 한국어 단어가 예사소리로 시작되면 거센소리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하여튼 그걸 뺀다 하더라도 좀 심각할 정도입니다.

만약 제가 한국의 국어정책을 담당하는 사람이라면, 전 그냥 국어사전에 '몇'이 '접두어'로도 작용한다고 슬쩍 끼워넣겠어요.

'몇년 몇월 몇일'이라고 쓰고 '몇월은 [며둴]로 발음된다'라는 예외사항을 하나 만들어 놓죠, 뭐.

'몇'이 접두어라는 이 천지가 개벽할 소리를 하는 게 너무 진보적이라면, 좋아요! 그냥 관형사로 내버려둔 채 '몇 일'은 [며칠]로 읽는 예외가 있다라고 하나 붙여넣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구는지 모르겠단 말이죠.

 

6월은 왜 [유월]이 표준 발음이라고 하면서, 10월은 왜 [시월]이 맞다고 하면서... 이런 예외 하나 만드는 게 뭐가 대수라고...

(아다시피 육월, 십월은 둘 다 틀린 표현입니다. 세상에 ㅋㅋㅋ)

이런 예외는 끊임없이 나옵니다. '맛없다'는 왜 [마섭따]가 아닌 걸까요. 

 


4
What you wanna do... 이걸 어떻게 발음하세요?

[와츄와나두]라고 읽기도 하겠고 [왇 유 와나두]라고도 하겠죠. 혹자는 [와쥬와나두]라고도 할 겁니다.

영어 배울 때 이것에 대해 고민하신 분 계십니까?

 

나는 파리에 간다는 프랑스어로 Je vais a Paris...라고 합니다.

[쥬배자빠히] [쥬배아빠히] [쥬배아빠리]... 아무 거나 고르세요. 다 실재로도 쓰이는 발음입니다.

그리고 그 악명높은 프랑스어 학회는 국민들이 스펠링을 어떻게 쓰냐에 관심이 있지 발음 부분에 대해서는 별 말을 하지 않아요.

 

스페인어로 가볼까요. Buenas noches [부에나스 노체스]도 되지만 뉴스 앵커조차 [부에나 노체]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어는 어떤가요. '나는 꽃을 꺾었다' 이 단어를 읽어 보세요.

[나는 꼬슬 꺼꺼따]라고 발음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요. [나는 꼬츨 꺼꺼따]만이 맞습니다.

'빛이 있으라!' 역시 [비시 이쓰라] 혹은 [비지 이쓰라]라고 발음하는 사람 많지요. 이거 전부 땡. [비치 이쓰라]만이 맞는 발음입니다.

하나 더 해 볼까요. '이 밤의 끝을 잡고'. 솔리드는 이 노래를 [이 바메 끄츨 잡고]라고 부릅니다. 이거 역시 땡. [이 바메 끄틀 잡고]가 맞습니다.

 

북한의 북부 지역과 조선족들은 '같이'를 [가티]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남한 사람들은 구개음화를 'ㅣ'가 아닌 'ㅡ'에도 적용시키는 경우가 많지요.

북한에서는 꽤나 철저하게 [비츨]이라고 발음되는 것들이 남한은 [비슬]이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말해 보세요. '무릎에'를 뭐라고 발음하세요. 전 개인적으로 [무르페]라고 하지만 [무르베]라고 발음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걸요?

'부엌에' 역시 [부어케]라고 발음하는 사람도 있지만 [부어게]라고 하는 사람 역시 꽤 많습니다.

 

이 역시 한글 창제의 원리 (ㅋㄲ은 ㄱ에서 왔고, ㅈㅊㅉ는 ㅅ에서 왔으며, ㅍㅃ는 ㅂ에서 왔다)를 떠올리면 그냥 예외로 넣어도 될 수준이라 전 봅니다.

(한글이 정말 음운학적으로 잘 만든 글자라는 게 여기서도 증명되죠. 비슷한 조음위치의 글자는 모양새도 서로 비슷하잖아요)

 

근데, 국립국어원은 이 우둔한 민중이 이렇게 잘못 발음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어디 그것 뿐입니까? 이젠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모음의 장단까지 살리면서 '바암'(먹는 밤)과 '밤'(시간)을 구분하라고 하질 않나,  ㅐ와 ㅔ, ㅚ와 ㅙ를 왜 똑같이 발음하냐고 호통치질 않나...

아니, 왜 언중들이 이미 쓰고 있는 언어를 지네 멋대로 재단하고 주눅들게 합니까?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이죠. 어디 네이티브 스피커한테 '너 잘못 발음하고 있거든'이라고 하나요.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5
좀 이상한 곳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네요, 흠흠.

 

결론을 내자면, 국립국어원은 언중들의 언어습관에 대해 별 고찰이 없이 자신들만의 상아탑 안에서 탁상공론이나 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겁니다.

아무리 [며칠]이라 발음이 난다 하더라도 언중들의 머릿속엔 확실하게 이건 '몇+日'이라는 개념으로 도식화되어 있습니다. 왜 그걸 무시하고 '며칠'이 표준어가 됐는지 나 원 참.

 

아마 우리 국립국어원이 다른 나라에 수출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되지 않습니까?

 

아마 일본으로 수출되면, 눈빛이라는 일본어인 [마나자시]는 目差し라고 한자로 쓰는 건 틀렸다고 할 겁니다. [메노사시]라고 발음되지 않는 것이 참을 수 없을 테니까요.

[이자카야]에서 술을 먹는 건 금지되고 아마 [이자케야]에서 먹거나 바람이 부는 방향은 [카자무키]가 아니라 [카제무키]가 되어야겠죠.

발음을 바꾸는 게 너무 힘든 일이라면 최소한 한자로 저 단어를 쓰는 건 금지시킬 겁니다.

 

중국에 수출된다면 아마 의사인 [따이푸]는 [따푸]로 변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아마 수많은 파음자(破音字)를 추려 표준발음을 정리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겠죠.

 


국립국어원은 '몇 일'이 [며칠]로 발음되는 것이 의아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사실 문자가 변하는 속도는 결코 발음이 변하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표음문자를 가진 아무 언어나 저한테 말해 보세요. 저는 그 언어의 문자와 실제 발음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여러 예시를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느 언어든지요.

그리고 사실 만들어진 지 별로 안 된 글자가 아닌 이상 글자와 실제 발음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글자의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 격차는 점점 벌어지기 시작하죠.

 (그렇기 때문에 국보 70호인 훈민정음은 조선 초기의 한국어 발음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서적입니다. 갓 만들어진 글자로 발음을 표기했기 때문이지요)

 

영어처럼 wanna, ain't 같은 속어부터 시작해서 LOL (Laugh Out Loud) 같은 최신 단어를 사전에 속속 집어넣는 것까지 바라지도 않아요.

제발 국립국어원은 일반 언중들이 평소에 하는 말을 좀 듣고, 제발 좀 언어의 변화 양상을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며칠]이라고 발음했지만 명백히 '몇+日'에서 왔다면 '몇 일'이라고도 좀 쓰게 해 주는 유연함도 좀 보여줬으면 하고요.

아니, '몇 일'이 [며칠]로 발음된다고 [며칠]의 어원이 '몇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럼 자신들의 정의인 '몇은 관형사이다'라는 것에 의문을 품든가 아니면 예외사항이라고 생각하는 게 순서지... 그럼 '6월'은 [유궐]이 아니라 [유월]이라 하는데, 그럼 [유월]의 어원은 '6'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한글이나 워드에서 '몇 일'이라 쓰면 빨간줄이 쳐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며칠'로 적지만, 진짜, 국립국어원 하는 걸 보고 있자면 진짜... 에휴.

 

 

뱀다리. 그리고 교육청은 국어시간에 학생들에게 이상한 시나 논설문 보게 한 뒤, 그 글의 작가도 잘 모르는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캐묻는 건 그만하고 맞춤법이나 가르쳐야 합니다.

한국어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국가기관에서 국민들에게 체계적인 맞춤법 교육조차 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냥 국어시간에 슬쩍 스쳐가며 선생님이 자기도 틀리는 맞춤법을 설명하고 끝내는 게 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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