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1985 보고 왔습니다.

금요일 늦은 시간이여서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마지막까지 숨죽이며 압도되어 봤고,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도 한참 동안 다들 조용히 있었습니다.

 

제가 많은 영화를 본건 아니지만 근 몇년간 본 영화 중에 이렇게 힘이 있는 영화는 처음이었어요.

영화는 의외로 덤덤한 편입니다.

중간 중간 영화적, 마술적 표현들이 나오지만 오히려 더 차분해지는 느낌이었어요.

한없이 한없이 가라앉는 느낌..

감독은 특별히 스타일을 과시하지도 않고, 감정을 마구 부추기지도 않았습니다.

차분히 있는 그대로만 보여줘도, 진실만 알려줘도 그 힘이 엄청나다는 걸 제대로 아는 것 같았어요.

 

영화는 스포일러라고 표시할 것도 없이 단순한 스토리 라인입니다.

말 그대로 고문에 대한 피드백입니다.

고문을 당하는 자의 공포, 나약함, 갈등, 부끄러움, 분노, 자기부정, 의지 그 모든 감정들.

고문을 하는 자의 일상적인 모습, 관료적인 모습, 전문가적인 모습, 인간적인 고뇌 등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모든 것들이 디테일하게 다 나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단순히 고문 자체에만 주목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고문 행위 보다 고문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들이 강조가 됩니다.

듀나님 리뷰대로 이 영화가 정말 공포스럽고 역겨운 건 이근안 캐릭터를 제외하고

자신을 사원으로 칭하는 이들은 회사의 직원처럼 때로는 농땡이를 피우며, 때로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월급쟁이로서 본인들의 일을 하루 하루 해나가고 있습니다.

고문을 당하는 사람에게 연애 상담을 하고, 불쌍히 여기면서도 그때 그때 일을 하는 것이죠.

이런 일이 자연스레 행해지고, 이른바 법이란 이름으로 엉터리 판결들이 나오던 그 시대의 모습들이 영화엔 고스란히 나와있습니다.

또 그런 고통과 모멸 속에서 무너지면서 또 일어나며 끝끝내 민주화를 쟁취했던 고마운 분들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고뇌와 고통이, 복합적인 여러 감정들이 영화 속에 녹여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면 저절로 죄송하고 고맙다는 마음이 듭니다.

 

아마도 어느 매체에서는 인혁당 사건을 다시 환기시키며 박근혜를 공격하는 유치한 선전물이라고 폄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고문 포르노그라피라고 원색적인 비아냥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정말 끝까지 눈을 똑바로 뜨고 본 뒤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시계 태입 오렌지>의 영화 속 장면처럼 박근혜의 눈을 강제로 뜨게 해놓고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안좋다 투덜투덜 댔지만.. 이 영화를 보고 정말 많이 반성했습니다.

우리가 당연시 누리는 많은 권리와 자유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정치적인 발언이 나왔지만.. 정치적으로 새누리당 쪽 분들이 봐도 보편적으로 큰 울림이 있는 영화라 생각됩니다.

분명 세련된 영화는 아니지만.. 이 울림과 무게감만으로도 감히 올해 최고의 영화가 될거라 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보고, 함께 영화의 힘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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