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대행사에서 1년간 카피라이터로 근무를 하다 오늘 사표를 냈습니다.

한참 동안 벼르고, 또 고민하던 문제라 갑작스런 결정은 아니지만 정작 지르고 나니

후련하기보다는 씁쓸한 기분이 더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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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업계는 워낙 이직이 잦은 직종이라 이직이 흠도 아니고

타업계처럼 '최소 3년은 버텨야'라는 관념에 조금 더 관대합니다.

(타이밍과 운만 맞으면 1년차 때도 이직을 하는 경우가 잦구요)

 

광고회사는 크게 기획과 제작으로 나뉩니다. 기획팀은 AE라고 불리는 기획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제작은 카피라이터와 디자이너로 구성되어 있죠. (미디어 플래너나 AP, PD등 다양한 직군이 있지만 크게는 저렇게 봐도 무방합니다) 제작팀의 경우 포트폴리오가 중요합니다. 얼만큼 다양한 제품군을 다루어봤는지, 얼만큼 괜찮은 제품을 다루어봤는지가 그 사람의 역량 평가 척도가 됩니다. 결국 이것은 몸담고 있는 대행사, 광고주의 규모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됩니다.

 

TV-CF를 공중파에 집행하고 있다면 회사가 작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급'을 인정받을 수 있으며 이는 대행사의 레벨을 결정짓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예컨데 연집행액이 100억인 인쇄 광고 전문 대행사가 있고 연집행액이 50억인 종합 대행사(TV, 지면 포함)가 있다면 이직시엔 후자가 나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보통 이런 경우 전자의 보수가 더 후한 편입니다) 큰 대행사에 다녀야 큰 클라이언트를 만나게 되고 큰 광고를 다룰 수 있게 되어 '능력있는 광고인'으로 평가받게 되는 것이죠.

 

자세히 밝히긴 어렵지만 저희 회사도 보유 광고주가 무난한 편입니다. 요즘 가장 광고를 많이 해대는 종목의 중형급 광고주도 보유중이고 지속적으로 광고를 하는 프랜차이즈 광고주도 2군데 가지고 있습니다. (그 외 몇몇 광고주 포함) 포트폴리오를 쌓기에 썩 나쁘지 않은 조건이죠.  남들에게 이야기하면 알 수 있을만한 광고가 몇 가지는 되니까요.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보자면 제가 다닌 이 회사는 포트폴리오를 쌓기에 적절하다고 볼 수 있는 마지노선에 걸려있는 회사입니다. 공중파 집행 TV-CF도 다루고 있으며 지면도 병행, 한때의 황금기도 보유하고 있으며 유명 대행사 출신의 대표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규모는 작고, 현업인이 아니면 잘 모르는 규모의 회사죠.

 

대한민국에서 크리에이터를 고용하는 대부분의 기업이 그렇듯 대형규모의 메이저 회사가 아닌 이상 급여가 상상외로 짭니다. 그렇기에 운과 실력이 뒷받침되어 스타트업을 메이저에서 하지 못하는 이상 마지노선 이상의 대행사에 들어가 경력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다 때가 오면 이직을 통해 합리적인 보수와 다양한 클라이언트를 경험할 수 있는 회사로 가게 되는 것이죠. 수많은 광고 지망생들이 진입자체에 실패하거나 진입 후 견디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저의 경우 마지노선에서 열심히 칼을 가는 케이스였죠. (뒤늦게 연애란걸 배워서 한참 달릴 시기에 놀아버린 대가를 취업에서 치르게 되더군요. 후회는 별로 없지만) 애초에 각오를 한 부분이고 직업에 대한 방향성도 제법 확고한 케이스여서 나름 잘 다니고 있었는데 이 회사, 문제가 많더군요.

 

1. 급여 연체

제가 다닌 기간 중 70% 정도의 기간은 급여가 제 날짜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10일 정도 연체는 기본, 2달 가량 연체가 된 적도 있습니다. 연체가 되면 직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사정에 대한 설명과 양해를 구하는게 기본이라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그 급여가 첫 월급인 사람만 (신입이나 이직해 온 경우) 따로 불러서 사정을 설명합니다. 가오 죽을까 그러는거겠죠. 직원들은 죽어라 일을 하지만 급여는 아무 소식없이 밀리기만 합니다. 다행히 안 나온적은 없습니다.

 

2. 경영 악화

이 회사의 대표님은 다른 사업체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광고업엔 이미 흥미가 떨어진 상태라 이걸로 대박을 꿈꾸고 계시죠. (도박사형 타입입니다. 경영자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근데 제가 다니던 대행사가 캐쉬카우라면 이 다른 사업체는 밑빠진 독입니다. 여기에 지속적으로 돈이 들어가고 있고 무분별한 투자덕에 광고 업무에 상당한 차질이 발생한지 오래입니다. (광고에 써야 될 돈을 미리 다른데 써버려서 난처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죠)

 

3. 역량 부문

회사에 제 사수가 대표님입니다. 즉 기획과 디자이너를 뺀 카피라이터는 저와 대표님 뿐이란거죠.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미 흥미를 잃으신지 오래기 때문에 대형 프로젝트가 아닌 이상 제가 대부분의 카피를 전담합니다. 아주 이따금 원포인트 레슨을 해주시구요. 가끔 있는 레슨에서 이상한 카피가 발견되어 그 길로 짐 싸서 집으로 간 카피들이 몇몇 있었다고 하더군요. 엉망으로 못쓰는건 아니구나 싶은 안도도 들지만 뭔가 본격적으로 배울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사실 이건 어딜가나 마찬가지 일겁니다. 요즘의 분위기상)

 

4. 직원들의 유체이탈 현상

본인들은 열심히 잘 일하고 있고, 돈도 잘 벌어서 드리는데 엉뚱한 지출이 심하다보니 그 타격을 대행사 식구들이 막아내게 됩니다. 분명 용도가 정해진 금액을 받았는데 그걸 딴데다가 썼으니 문제가 생기는거죠. 급여도 만성 연체가 되기 시작하고. 이러다보니 근퇴, 열정, 아이디어 발상 등에서 상당히 나태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이게 만성화 되어 있습니다. (그러는게 이해가 가기도 하구요)

 

5. 대표님의 무개념

이 분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아이템이 대박나기만 하면 이 모든 난국이 타개 될거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표님을 제외한 모든 구성원은 절대 성공할리가 없다고 전망하며, 이미 망한게 자명한데 계속 죽은 자식 불알만지기를 하고 계신다고 봅니다. 이렇다보니 회사에 비전이 보이지 않으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2개월 연체가 되어있던 시점에 이 분은 자신의 차를 국산에서 벤츠로 바꾸었고 집도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사를 합니다. 같은 시기에 회사 이전도 감행합니다. 회사가 집이랑 가까워져서 좋긴 하지만 직원들이 월급을 받고 있지 못한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건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근데 사람 마음이란게 희안한게 측은하다는 생각도 종종 들더군요. 빚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면)

 

기타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이 많지만 대략은 이 정도로 정리가 됩니다.

 

적지 않은 나이의 카피지망생을 거두어줘서 감사하다는 생각도 자주 했었고 이런저런 포트폴리오들이 쌓여가면 흐뭇하기도 하고 했습니다. 하지만 위의 상황들이 만성화되다보니 아무리 광고가 좋아도 그렇지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사소한 불합리들이 이어질때면 과하게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구요. 야근이나 철야가 잦은 직종이라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많은데 이런 상황들이 겹쳐지니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더군요. 존경해 마지않는 최창희씨가 크리에이티브 에어 시절, 기획서 서두에 늘 쓰던 '옷 입고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일이 광고라고 믿는다'는 말은 지금의 저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업에 대한 회의는 그리 크지 않아요. 회사에 대한 회의가 크지.

 

그래서 결국 오늘 사표를 내었고 수리가 되었습니다. 같이 일을 하던 동료들은 만류를 했고 아쉬워 하지만 정말 더 이상은 견디기가 어렵더군요. 사람의 마음이란게 참 이상한게 마냥 시원할 줄만 알았던 기분이 오히려 씁쓸합니다. 앞으로가 걱정이 되기도 하구요. 11개월 정도의 경력인데 갈 곳을 정해두고 나온게 아니다보니 당장이 이직은 어려울테고, AE나 디자이너에 비해 카피는 워낙 뽑질 않아서 불안한 기분도 듭니다. 2,3개월 이내에 재취업을 하게 되면 큰 상관이 없겠지만 이 상황이 지속되면 11개월이라는 애매한 경력은 이도저도 아닌게 될거 같기도 하구요. (2,3년차 정도였다면 좀 더 놀아도 재취업이 어렵지 않았겠지만요)

 

하.

일단은 모르겠습니다.

제주도에 10일 정도 다녀올려고 해요. 3일 정도는 돌아다니며 구경을 좀 하고, 7일 정도는 1인 게스트하우스에 처박혀 시나리오를 한편 완성해볼까해요. 계획해둔건 없는데 예전에 써둔 시놉들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완성도보다는 완주에 중점을 두고 써볼려고 합니다. 108배를 하는 불자의 심정이랄까요. 순전히 수도의 행위지 뭘 바라고 쓰는건 아니구요. 직장 문제도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될지 전혀 감도 안오구요.

 

쭉 쓰다보니 느껴지는게 '글이 너무 길다', '쌓인게 많긴 많았구나' 싶네요. 다음번엔 좀 더 재밌는 소식으로 돌아왔으면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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