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회사에 사표 냈습니다. 4

2014.03.22 15:49

sonnet 조회 수:3633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더 이상의 제주 방랑기는 올리지 않으려 했는데 어제도 재밌는 일들이 몇 개 발생해서 이렇게 또다시 뻘글을 투척합니다.
 
한라산 등반의 여독을 풀기 위해 찜질방에서 자고 일어나 바이크를 렌트하러 갑니다. 저보다 앞서 도착해있는 20대 초반의 두 청년이 설레는 표정으로 스쿠터 렌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가죽 점퍼를 입고 나타나 호기로운 표정으로 모타드 바이크에 올라타 후까시를 주고 있는 저를 신기하게 쳐다봅니다. 제가 렌트 절차를 거치는 동안 두 청년은 스쿠터 강습을 받았는데 렌트사 직원이 지나가는 말로 저에게 “아무래도 저 청년들은 렌트를 안하는게 좋겠다”는 말을 하고 갑니다. 
 
제 면허증을 보더니 ‘2종 소형’ 항목이 추가되어 있는 것을 보고 “보험은 안 드실거죠?”라고 당연스레 물어봅니다. 이래서 다들 자격증 타령을 하나 봅니다. ‘넌 운행에 대한 자신감은 있을테니 보험료가 아까울거 아냐’라는 뉘앙스였거든요. 하지만 사고는 사람의 의지와 무관한 것. 보험을 들고 여행을 출발합니다.
 

딱히 갈 곳을 정해두진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찾다가 처음 목적지로 결정한 곳이 용머리 해안. 중심부를 가로질러 가는 방법이 있고 해안도로를 따라 내려가는 방법이 있는데 후자는 소요 시간이 너무 길어서 내부 도로를 이용합니다.
    

이제 하나둘씩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날씨가 너무 춥습니다. 겉보기엔 좋아 보이는 날씨인데 (10도 내외)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서 바이크를 타기에 부적합한 날씨입니다. 약 60%정도의 거리가 남은 시점에서 바이크를 반납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시간, 비용, 기회 모든 것이 아까워 가던 길을 재촉합니다.  
 
주행에 어려움이 있다 싶을 정도로 상반신과 손이 심하게 떨립니다. 거의 한계점에 도달할 무렵 중문관광단지에 도착했습니다. 원래는 용머리 해안 근처에서 토속 음식을 먹으려 했지만 지금 그런걸 따질때가 아닙니다. 바람이 불지않는 실내 식당이면 어디든 좋을 듯 합니다.

    

마침 파파이스가 눈에 띄어 지체 없이 들어갔습니다. 롯데리아나 맥도날드였다면 좀 더 서칭을 해봤을거 같은데 파파이스는 서울에서도 갈일이 드물기에 선택이 쉬웠습니다. 주문을 하고 앉아 있자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잘 정리된 관광단지가 경사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여러 숙박업소와 카페, 브랜드 의류 매장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마치 베버리힐스의 아울렛 타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묘한 쾌적감이 기분을 좋게 합니다.
 

방한성을 띤 의류는 전날의 한라산 등반에서 다 소모를 했고, 세탁을 하지 못한 관계로 선택이 불가능하기에 옷을 사입기로 결정합니다. 친철이 넘치는 파파이스 직원 아주머니에게 근처에 옷을 사 입을 곳이 없냐고 물으니 같은 건물 2층이 의류매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옆 건물에 폴로매장이 있다고 알려주시며 “근데 여긴 다 너무 브랜드들 뿐이라”며 안타까워 해주시네요. 그렇습니다. 오늘의 추위를 피하고자 옷을 살려는 건데 폴로 퀼팅 자켓 같은 걸 살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주변의 행인분과 관광안내소의 도움을 받아 약 10여분 거리에 있는 서귀포시에 가야 의류 매장이 있을거란 정보를 입수 했습니다. 중문단지는 워낙 정통 관광단지라서 주거민들이 이용하는 의류 매장이 거의 전무하더군요. 더 이상 이동이 불가능한 컨디션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서귀포로 향합니다. 평소엔 망한 브랜드라 치부하던 뱅X을 떠올리며 “그런곳이 아마 싸고 따뜻할거야”라는 상상을 가지고 서귀포에 도착합니다. 그때 멀리보이는 사인이 있습니다. ‘이마트’
 

제가 조금만 더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으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을 거 같습니다. 이마트 CI를 보는 순간, 그 저렴하고 다양한 PB 상품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이미 체온이 5도는 오른 듯한 착각을 느낍니다. 한라봉과 천혜향을 한 알씩, 발열 내의(하의)를 포함한 2만원치의 의류를 사서 겹쳐 입었습니다.

 
따스함 덕에 의기양양해진 저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해가지기 전 처음의 목적지인 용머리 해안으로 이동합니다. 용머리 해안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언덕 정상을 지나 내리막이 시작되며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집니다. 동시에 들리는 불쾌한 금속 마찰음. 길쭉한 금속 막대가 바닥에 떨어진 소리가 납니다. 바로 바이크를 정지하고 내려 보니 체인이 풀려있습니다. 학생 때 같은 경험을 한적이 있는지라 크게 당황스럽진 않습니다. 손으로 체인을 대기어에(뒷바퀴에 부착되어 있는 태엽) 끼워보는데 너무 쉽게 끼워집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대기어를 고정하고 있는 4개의 볼트 중 3개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고속 주행시 이 볼트들이 풀렸다면 전 아마 90% 이상의 확률로 죽었을 테니 말이죠. 렌트사에 전화를 하니 인근 센터에서 비상 정비가 출동할거라 합니다. 이건 바이크를 평소에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오너, 혹은 미케닉의 과실이 95% 이상이라 봐야하는데 별로 화가 나지 않습니다. 펼쳐지고 있는 풍경, 한라봉을 까먹을 시간이 마련되었기 때문이죠.  
 

한라봉을 까먹고 있자니 1톤 트럭이 한 대 멈춰섭니다. 해당 렌트사와 친분이 있는 곳일 뿐, 별다른 책임이 없는 곳이기에 데면데면한 투로 수리를 진행합니다. 다행히 출장 수리로 마무리가 가능하다더군요. 수리 후 연락을 달라던 렌트사에 전화를 하니 상당히 미안해합니다. ‘보험을 드셨으니 비용은 발생하지 않아요’라는 식의 대응이면 가게에 불을 지르려 했는데 대응도 상식적인 수준이라 평온한 기분이 유지됩니다. 
 

용머리 해안을 거닐며 필름 카메라의 셀프 타이머 기능을 적극 활용, 셀카를 엄청 찍어 댑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봐도 개의치 않습니다. 이때가 오후 여섯시, 이제 숙소로 돌아갑니다.
    

이 날은 부러 ‘전형적인’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해 뒀습니다. 상당히 높은 확률로 저녁 술자리가 벌이지고, 여행에 설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넘칠 거 같은 그런 곳으로 말이죠. 이런 곳도 하루쯤은 경험해보고 싶었거든요. 짐을 풀고 홀로 저녁을 먹고 들어오니 게스트하우스의 직원분이 “술자리가 마련되었는데 참석 하실래요?” 하길래, ‘드디어 2차 장사가 시작된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선선히 참석 의사를 밝혔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순수한 목적으로 발생한 술자리였고 안주와 술을 두 분의 여성분이 제공했습니다. 이윽고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남자 아홉, 여자 둘로 이날의 멤버가 완성됩니다. 살이 심하게 찐, 전형적 개냥이가 감독관의 역할로 입회. 독특한 캐릭터가 2명 있었는데 한 친구는 올해 고3인 97년생의 청소년. 대안학교를 다니는데 고3은 필수적으로 한 달 여행을 다녀와야 한다더군요. 자전거를 타고 혼자 제주도에 왔다고 합니다. 당연히 이날의 가장 핫한 멤버. 이 친구가 다니는 학교는 흡연과 음주를 공식 인정하며 흡연 지역도 존재한다고 합니다. 담배를 피다가 선생님이 지나가면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누는 분위기랄까요.
 
졸업하면 어떤 전공을 하고 싶냐고 물으니 굳이 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물으니 기타치고 농사지으며 살고 싶다고 대답합니다. 아... 이게 대안학교의 위대함인가요. 이렇게 해맑고 밝은 영혼을 얼마 만에 만나보는지. 이 친구의 부모님은 서울대 CC로 졸업과 동시에 귀농을 결심, 꾸준히 삶을 개척하고 계신다더군요. 같은 방에 묵었기에 “오늘 밤 조심하는게 좋을거야”라고 농담을 했더니 진심으로 이해를 하지 못하는 눈치입니다. 늦게 온 두 형님이 고3의 여행을 이해하지 못하시자 제가 “교장한테 ‘나 제주감 ㅋㅋ’라고 문자 보내고 왔다”고 거드니 다들 진짜 믿으며 멋있다하고 합니다. 두 형님이 같은 방인 것을 알고 저와 같은 코드의 농담을 던집니다. 짖궂은 남성동무들이여.

 

두 살 연상의 여자친구가 있다기에 저는 또다시 농담을 던집니다. (제가 너무 짖궂나요) 대학가서 신세계를 경험하다보면 여자친구가 좀 소홀해지지 않더냐고 물으니(살인의 추억, 김뢰하 코드로) 여자친구도 대학을 가지 않아서 괜찮다고 합니다. 아까의 두 형님이 “열여덟 스물이 데이트하면 뭘 하지?”라고 수줍게 물으며 “맥도날드나 롯데리아, 이런델 즐겨가나?”라고 했더니 대답이 걸작입니다. “에이, 뭐 별거 있나요 그냥 같이 별보고, 걷고 그런거죠”

 

하... 진심을 담아서 ‘아름답다 아름다워’라고 탄성을 내뱉었습니다. (우아한 세계의 송강호 톤이었지만 마음만은 진심으로, 오늘은 송강호 드립인가요)

 

아무래도 여성분이 소수다 보니 이날 멤버들의 주요 질문 대상이 되었는데 지리 설명을 하는 도중 한분이 “음... 한시 방향이었나, 아니다 한시반쯤?”이라고 말하길래 제가 “군대도 안다녀 오셨는데 군 용어에 너무 친숙하시네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저 군대 다녀왔어요”라고 하셔서 일동 폭소. 다들 농담이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부사관 출신이시더군요. 일동 열광. 분위기에 힘입어 군대 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 -_- 총이야기 부분이 압권이었습니다. 제가 "그럼 K-1 소총을 쓰셨겠네요“라고 했더니 ”그것도 쓰고 38구경도 썼어요“라고 합니다. 다시 일동 경악. 38구경은 미국 경찰이나 카우보이들이 쓰는거 아닌가. 마침 전차병 출신 형님이 계셔서 K-5를 말하는거 아닌가요 라고 물었더니 진짜 38구경이 맞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군내에 38구경을 쓰는 곳이 몇 있다고 하더군요. 이야기는 이윽고 ”38구경이 2인치가 있고 2.5인치가 있는대로 이어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모든 남성 동무가 거실 바닥에 머리를 박고 얼차려를 받고 있습니다. 전날 있던 게스트 하우스에서 계급 드립을 쳤다가 그 자리에 대위 전역자 분이 계서서 상황이 종료되었었다 하더군요. 11시 정도가 되자 자리를 마무리하고 잠을 청하러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낮의 소소한 사고와 기분 좋은 주행. 그리고 이마트의 위대함.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들른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유쾌한 사람들. 이렇게 길게 여행을 떠나본 게 태어나서 처음인데 ‘이래서 다들 떠나는 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담당하던 브랜드 중에 아웃도어 브랜드가 있었는데 TVCF용으로 썼던 카피 중에 이런게 있습니다.
 
 


#
 
NA)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거센 폭포가 배경. - 반어적 표현)
NA)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협곡을 통과, 숨찬 모습 - 반어적 표현)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곳
나는 나를 찾으러 왔다
 
-하략-
 


원래는 이 뒤에 이 브랜드의 메인 키 카피가 붙습니다. 그 키 카피에서 파생될 수 있는, 지금 껏 집행된 내용과는 다른 인사이트를 찾다가 ‘스스로의 위로’가 등산객들의 메인 코드 중 하나가 아닐까란 생각에서 출발하여 썼던 시안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 정해진 결론을 위해 앞의 서사를 풀되, 색다르게 풀고자 했던 것이죠.
 

내부 리뷰 단계에서 탈락된, 죽은 시안이지만 지금의 제 심정을 대변해주는 내용이다 싶어 어줍잖지만 적어봤습니다. 게스트하우스 방명록에 있던 “저를 찾으러 왔습니다”라는 문구를 보고 떠올랐기도 하구요.
 
 


지금은 마지막 숙소인 해안가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현관을 나서면 바로 바다가 펼쳐지는, 편의점이나 택시, 관광 식당을 찾아볼 수 없는 조용한 시골 동네에 위치해 있으며 여기서 운영하는 카페에 앉아있습니다. 사과브로콜리주스라는 (브로콜리도 제주도의 특산품이라더군요) 마음에 쏙 드는 음료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평온하고, 조용합니다. 이곳의 투숙객은 저 뿐인 듯 하구요. 3일간의 바쁜 일정을 마치고 이제는 조용히 야설 집필에 집중하려 합니다. 제주도 이야기는 더 이상 올리지 않을려구요.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 또 새로운 소식이 생기면 이곳을 통해 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도 묻지 않는 안부지만 이렇게 또 전해봅니다. 다들 부드러운 주말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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