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옷 왕 단편선.

2014.05.27 13:34

잔인한오후 조회 수:1031

1. 책 뒷면의 두 번째 문단을 독서 전에 읽지 않기를 권합니다. 첫 단편의 거의 모든 얼개가 쓰여있어요.

2. 번역 노트에 <트루 디텍티브>의 마지막 화 내용이 있습니다. 안 봐서 중요한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의하세요.

3. 바지 뒷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때 조심하세요! 경험없는 독자는 책을 망가뜨릴 수 있어요. (저 말입니다, 저.)

 

책을 읽지 않고 이 글을 읽을 분들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전하고 싶은 경고 문구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노란 옷 왕 단편선] 서평 이벤트"를 이유로 쓰인 글임을 명시합니다. 호혜적인 독서 상황에서 편향되지 않은 글을 쓸 수 있을지 몰라서 말이에요. 공공선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긴 하지만, 면죄부를 사두는게 맘이 편하잖아요.

 

썩 재미있진 않았는데 다시 읽고 싶어지는 소설과 정말이지 재미있었지만 다시는 읽고 싶지 않은 소설 중, 어느 쪽을 더 좋아하시나요? 이런 질문은 치사하기 그지 없어서, 저의 경우에도 "그냥 둘 다 볼 거에요!"라고 하겠습니다만, 굳이 따진다면 전자를 약간 더 좋아합니다. 이 소설은 제 머리 속에 전자로 분류되었습니다. 잠깐,  왜 그런 차이가 일어나는가가 고민스럽군요. 마치 하얀 옷에 묻은 얼룩처럼 기억에서 지워지질 않고, 그게 어떤 것인지 다시 확인해야만 하는 소설은 한 번의 독서로 독자에게 흡족함을 주지 않기 때문인가 싶어요. 내가 이 소설을 다 이해했구나하는 안심을 주지 않는단 말이죠.

 

제가 듀나님의 단편 소설 몇몇을 좋아하는 이유도, 부정기적으로 그게 어떤 내용이었고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문뜩 떠오르는 서욕을 채우기 위해 찾아 읽게 된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이 로버트 체임버스란 작가도 그런 류의 특이한 정서적 낙인을 제 머리 속에 새기는걸 성공한 듯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한 번 읽은 상태에서 이 책에 대한 글을 쓰기는 꺼려지지만 서평 마감 기한이 있기에 지금까지 느낀 점으로만 글을 써 봅니다.

 

책을 읽는 행위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칠까요? 노란 옷 왕은, 강대한 영향력의 서적을 상정하고 그것이 사회에 출현했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는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중심 소재(혹은 멕커핀)의 많은 부분을 비워두고 그 주변부로 갈수록 더 상세해지는 묘사를 통해 독자에게 세계를 인식시킵니다. 제 기준으로는 일종의 떡밥 소설인데, 당연하게도 그 떡밥의 실체가 명쾌하게 드러날리 없는 류의 소설입니다. 사실 처음 읽을 때는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를 독자와 작가가 밀당을 하면서 어떤 소설에서는 자신이 숨겨놓았던 설정들을 참지 못하고 폭로하는 경우도 있고, 체임버스처럼 끝까지 침묵해서 너가 보는 부분으로만 알아서 판단하라는 자제력 높은 작가도 있죠.

 

그렇게 되면 저의 경우, 서술 해체를 즐기게 됩니다. 과연 이 작가가 설정을 어디까지 해 놓았을까, 아니면 설정을 전혀 하지 않고 무방비한 상태로 [설정을 해 놓은 것처럼 보이]게 서술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해 놓은 것처럼 보이]는 서술은 어떤 전략적인 글쓰기를 통해서 날 납득시키는가, 로 넘어가게 되는 겁니다. 체임버스의 두 작품을 읽으며 그 제목인 <노랑 옷 왕>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주 적습니다. 그 파문에 일그러지는 세계만이 우리 눈에 보이고, 정말 그러하거나 진짜 그런 파문이 그려질지를 끊임없이 되물으며 독해가 가능하게 되는거죠. 이런 재미는 작고 큰 음모론을 다룬 소설들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데, 설정 뿐이고 설득력 없는 소설은 작가와 씨름하는 재미가 없어서 한 번 읽고 덮게 됩니다.

 

사람을 완벽하게 매혹시키고, 그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 창작품이란 건 상당히 매력적인 소재입니다. 게다가 이 소설은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TV는커녕 라디오도 없었던 시절 쓰였죠. 그런 세대 격차를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는 강력하게 느낄 수 있으면서도 어느 선에서는 전혀 느낄 수가 없어요. 다르게 말하면, 소설이 낡았다는 기분을 느끼기가 힘들었다는 거에요. 아무 생각없이 자연스레 읽었던 1920년대까지 발전해가는 미국의 모습 서술은, 사실 1880년대에 추측해서 그린 모습이죠. 21세기에 20세기의 가상 역사를 읽는데 까닥하면 속아넘어갈뻔 하니 (당연하게도 세계대전을 추측하진 못했지만) 작가가 노련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다른 설정들도 편집증적으로 준비해 놓지 않았을까 하는 신뢰를 주더라구요. (그러고보니 다른 소설에서 낡았다는 체취를 심히 느끼는 부분은, 쌩뚱맞은 미래기술인데 이 소설들은 그런걸 최대한 피해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런 설정의 그림자들은 나중에 몇 번 더 읽으면서 파악이 되겠죠.

 

제가 좋아하는 한국 한시의 구절 중에 "밤하늘에 날아올라 북두칠성을 허리에 꿰어 차고"가 있습니다. (정확한 해석은 좀 다르지만.) 현대에서야 밤하늘에 별이 있는지도 알기 힘들지만 과거 사람들이야 말로 눈에 보이는 우주에 더 가까이 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는 구절이고, 그 질러갈 수 있는 상상력을 확인 할 수 있는 구절이죠. 방향은 다르지만 "사르코사의 망자" 같은 경우에도 아직 SF라는 말도 없던 시절, 우주로 통하는 다른 경로를 발견하고 소설로 쓴 게 아닐까 생각되더라구요. 앞의 두 소설과 함께 느리고 절제된 형용이 상당히 취향에 맞아 떨어졌습니다.

 

아무래도 나중에 한 번 더, [내용있음]이란 서두를 달고 글을 쓰지 않을까 싶네요. 아닐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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