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4학년때의 일이다.

변웅전씨가 진행하던 묘기대행진에서

속독법이란 것을 배운 여자 어린이가 두꺼운 책을

몇 분만에 독파하는 것을 보고 감명받으신 울아버지,

나와 여동생을 봉천동에서 머나먼 광화문까지

150번 버스타고 다니며 속독법 학원에 다니게 명하셨다.

 

그 묘기대행진으로 유명세를 탄 원장은

늘 웃는 얼굴의 인상좋은 아저씨. 달변이다.

일본 나까무라상 어쩌구 정체불명 박사가 개발했다는

속독법은 훈련에 의해 잘못된 독서습관에서 비롯된

낭비적 요소를 없애고 가장 효율적인 동선에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며 속으로 따라 읽지도 말고 시각적으로

정보를 바로바로 받아들이면 획기적으로 독서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기술이었다.

 

학원에서 하는 것도 동그라미가 줄을 지어 배치된

교재를 눈이 빠지게 쳐다보면서 이경규처럼 눈알을

좌우로 띵요띵요 돌려서 모든 줄을 최대한 빨리 훑어보는

가속 훈련이었다. 스톱워치로 1분에 몇 글자나 읽는지

(정확히 말하면 눈에 바르는지) 측정한다.

 

난 눈동자가 휙휙 잘 움직이지 않아서 느린 편이었다.

어떤 중학생 누나는 신기에 가깝게 눈동자를 잘 굴려서

신기록을 갱신하곤 했다!  분당 5천자, 7천자..

이거 한참 하면 다들 눈물을 휴지로 닦아내야 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참 가관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남녀노소가 앉아서 요이, 땅! 하면

눈알을 좌우로 굴려댄다. 데굴데굴. 누가누가 빠른가.

 

모든 글자를 눈동자를 굴려서 발라내야 하는 단계에서

열등생이었던 나는 다음 단계에서 갑자기 백조로 변신한다.

다음 고급 단계는 선에서 면으로 입력 단위를 넓힌다.

한 페이지를 대각선으로 죽 훑어내리면서 모든 글자를

보려하지 말고 핵심단어 위주로 정보를 받아들이라는 거다.

 

이 단계가 되면 책장을 빨리 넘기는 스킬이

핵심과제가 된다. 다들 나름의 필살기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침을 얼만큼 묻혀서 어느 각도로 넘겨야 빠른가.

눈알만 돌리다가 눈물 닦던 교실에

이번에는 촤르르륵 종이 경쟁적으로 넘기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너도 나도 조금이라도 1분당 본 글자 속도를 높이려고

경쟁하는 학원 분위기에 짜증나기 시작한 나는

그냥 아무렇게나 미친듯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분당 1만자, 2만자, 3만자....10만자, 20만자, 30만자, 펑! 대폭발.

묘기대행진 출연 학생의 경지를 넘어섰다.

300페이지짜리 책을 3분도 안 걸려서 독파한다.

 

사실, 당시 나 스스로도 내가 책을 넘기기만 하는 것인지

속독법에 따라 빨리 읽는 것인지 헷갈리고 있었다.

대각선으로 휙휙 훑어봐도 사실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캐취된다. 원래 대강의 스토리를 알던 경우에는 훨씬 더.

나는 원장에게 물었다.

저, 솔직히 몇몇 단어와 조각조각 내용들만

들어오고 세세한 부분은 보지 못하는데 괜찮은 거예요?

원장은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원래 그렇게 하는거다,

넌 참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었다.

 

속도측정후에는 각자 읽은 내용을 모두에게 설명해야 한다.

문제는, 무서운 아버지의 강압으로 세 살때 한글을 배워야 했던(기억없음)

이후로 집에 틀어박혀 애들 책이고 어른 책이고 미친 듯이 읽어대던

책벌레, 활자 중독증(읽을 거리 없이 화장실에 앉으면 불안해져서

벽에 붙은 찢어진 신문지까지 읽었다) 환자였던 나는

그 학원에 있는 거의 모든 책을 이미 다 읽은 상태였던 점이다.

게다가 구라와 뻥 실력은 타고난 것,

보든 안 보든 다 잘 설명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갈수록 경악.

 

난 어차피 아버지의 강압으로 다니던 학원이고,

갈수록 점점 이게 다 미친짓이라는 확신이 강해지고 있었기에

그런 반응들이 통쾌하기까지 했다.

책 좀 빨리 읽어서 무슨 입신양명을 하시려는지

막내인 우리 남매 위로 중고생, 대학생, 직장인까지

열심히 눈알 데굴데굴, 책장 휘리리릭에 목을 매고 계셨거든.

눈알 빨리 잘 굴리던 초반기 우등생 누나가 나를 따라잡아 보려고

바둥거리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경외의 눈초리로 쳐다보게 된다.

 

그렇게 여름방학 동안의 학원수업은 끝이 났다.

문제는 그 다음 해 여름방학.

원장으로부터 울아버지에게 섭외가 들어왔다.

 

속독법 바람이 전 같지 않아 수강생이 적은 모양인지

내가 와서 시범을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수고비로 만 원인가 2만 원인가 여하튼 당시로는

쏠쏠한 돈을 주겠단다.

 

아버지는 장남이 어디가든 뭘하든 1등한다고

친지들에게 자랑하는 재미에 푹 빠져 계셨던지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거 원장님 좀 도와드리지 그러냐,

하시는 것이었다.

 

난 싫었다. 그런 허접한 쌩쑈 또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엄한 아버지 밑에 크는 공부잘하고 말 잘 듣는(것처럼 연기하는)

장남은 결국 네, 하고 따르게 된다.

 

가보니 아닌게 아니라 원장님은 사람 좋은 미소가 줄어들고

조금 초조하고 지친 모습이었다. 수강생도 줄었고.

모인 사람들은 수강생 뿐 아니라, 긴가민가 하면서 들른 사람들도 있었다.

말하자면 불신자들이다. 속독법의 위력을 우리 때 학생들처럼

확신하고 눈 굴리라면 굴리는 열성 신자들이 아니었다.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자들. 원장이 그들을 위해 준비한 기적이 나였다.

 

원장이 집어주는 책을 미친듯한 속도로 넘겨댄 후

줄거리를 줄줄줄 읊어대는 나를 보며

불신자들의 입에는 탄식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동화나 어린이 명작을 넘어 중고생용, 성인용 명작까지

휙휙 읽어제끼자 탄식은 열광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당시 이미 내 독서범위는 상당히 넓었던 것이다.

노총각 삼촌들이 전집으로 구매해 놓고 보지도 않던

한국전후문학전집, 한국근현대소설선, 세계문학전집,

일본역사소설 대지, 대망, 삼국지, 열국지, 수호지,

심지어 가정요리전집(일본책의 해적판이었음)까지

세로줄로 빽빽한 책들을 탐닉하듯 읽어대던 중이었다.

 

충분히 불신자들의 열광을 이끌어낸 후 무표정하게

일어서려는 순간, 원장이 나를 잡았다.

평소와 달리 그의 눈동자에 뭔가 망설임이 일렁이더니,

나에게 끝으로 한 권만 더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평소 나에게 내밀던 각종 고전 명작류와 다른 책이었다.

중국 고전 소설 '금병매' 1권이었다.

...그렇다. 원장은 어느 순간, 정말로 내가 속독법으로

몇 분 만에 두꺼운 책을 읽어내는 것인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내 독서범위를 대충 눈치채고 있던 원장은 나름 내가

읽었을 법한, 하지만 일반인들은 어린이가 읽었으리라

미처 생각 못할 정도의 명작을 절묘하게 내밀곤 했었다.

푸쉬킨의 '대위의 딸' 같은거.

 

속독법 이론을 전수받아 가르치기는 하지만, 본인은

눈이 느리고 해서 직접 잘 하지는 못한다고 늘 겸손해 하던

그는 한 번 내게만 몰래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묘기대행진 나갔을 때, 내가 그래도 온 국민이 보는

방송 앞인데 실수할까봐 불안해서, 걔한테 평소 미리 보았던

책으로 시범을 보이자고 했거든? 근데 걔가 방긋 웃으며

괜찮다는거야. 그러더니 학원에서 본 적 없는 명작을

술술 읽어내더라고."

...그렇다. 그 역시 자기가 가르치는 속독법에 관한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많은 불신자들 앞에서 내게 '금병매'를 내민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에드가 알란 포의 '고발하는 심장', 또는 절벽 끝에 서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미칠듯이 뛰어내리고 싶은

그런 인간의 이해할 수 없는 불나방 같은 심리?

자기 스스로도 믿지 못하면서 가르친 것이

기적을 정말로 낳을 수도 있는 것인가 불신이 흔들리는 상태?

 

여하튼 금병매는 중국 4대 기서 중 유일하게 내가 볼 수

없었던 책이었다. 어떤 미친 놈이 국민학생에게 그런 책을

읽게 하겠나. 긴장되었다.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는데 낯 익은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무송, 무대, 반금련, 서문경.  수호지 전집은 당시

나의 favorite의 하나였던 것이다.

금병매 1권은 수호지의 무대/반금련 스토리의

장편인 셈. 기본적인 정보가 주어진 상태에서

실제로 오랜 독서습관으로 책을 상당히 빨리 보는 편이고,

이야기 지어내기를 잘하던 나는

휙휙 넘기면서 눈에 들어온 여러 정보들을 조합해서

그럴 듯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이답게 그런데 옥문, 양물이 뭐에요? 라는 귀여운

질문까지 곁들여서.

 

애한테 그런 책을 쥐여주었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다들 경악을 넘어 환희의 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엘머 갠트리가 주재하는 부흥회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힐끗 원장을 쳐다보았다.

...이 아저씨, 정말로 감동한 눈으로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잔치가 끝나고 지폐를 받아든 나는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참 옛날 일인데도 너무나 선명하게 그 때의 생각들이 평생 남아있다.

 

나는 사기의 공범일까?

나름대로 나도 중간중간에 속독법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었는데

원장도, 동료 학생 어른들도 항상 웃으며

원래 속독법이란게 정독과는 다른거라서 그런거라며

괜찮다고 하곤 했었다. 

왜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바보 짓거리를

어른들이 돈 내고 와서 눈물 흘려가며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게 TV를 타고 전국민이 보기도 하고.

세상이란 원래 이렇게 장난 같은 것일까?

이런 짓을 어린애한테 돈 주고 시키는 어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이걸 정말로 믿고 있는 걸까? 아니면 믿는 척 하는 걸까?

난 다 귀찮고 혼자 방에서 좋아하는 책이나 실컷 읽고

싶을 뿐인데 왜 어른들은 내게 이거 해봐라, 저거 해봐라

간섭하는 것일까. 

 

묘한 것은, 난 탄식과 열광에 빠져있던 불신자 집단에게는

미안하지 않았다.

그들은 뭔가 희망을 발견하고 행복해하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눈가가 촉촉해져 있던,

원장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가끔 세상이 다 속독법학원 같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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