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맨정신으로 선혈난무하고 사지분리되는 영화는 못 봅니다.

홍콩 무협영화나 느와르 정도로 피 튀기고, 인형이 산산조각 나는 장명 정도야 멀쩡히 잘 봅니다만,

이상하게 그런 건 그냥  '그림'이란 생각이 드는데, 사실적으로 표현된 건 정말 '진짜'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지 거부감이 심하게 들어요.

이 영화가 상당히 호평을 받을 때도, '여자의 복수'란 소재는 꽤나 마음에 드는데, 벌건 대낮에 낮부림을 한다든가, 낫으로 사람들을 해치운다든가,

잘린 머리까지 나온다는 글들을 보면서는 보고싶은 맘을 접을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이런 종류의 피 튀고 사지 절단 되는 영화엔 전혀 거부감 없는 동거인(;;)이 영화를 다운받아놨고, 이 김에 한번 봐볼까 싶기도 하고,

해서 어제 케이블에서 해준 '여배우들'보며 술도 좀 홀짝거리며 정신 좀 풀어놓은 상태에서(워낙 맨정신으론 못볼 거 같아)..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 잔인은 개뿔이 잔인..ㅠㅠ 끔찍한 장면 못 견딜 거라고 이제까지 안 본 제 선입견이 원망스럽습니다ㅠㅠ

전 정말 유혈 낭자한 영상물 보면 경기 일으키는 타입인데, 그리고 한국영화는 쓸 데 없이 폭력적이고 피 튀기는 장면들 집어넣는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김복남 보면서는 그런 생각 따위는 코딱지만큼도 안 들더군요.

속으로 '더, 더, 더!!'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김복남이었으면 가장 잔인하게 낫질했을 사람은 만종이나 철종이보다 시고모였을 거에요.

말리는 시누이도 밉지만, 안말리고 부추기는 시고모는 폭풍낫질도 모자라게 증오스럽다는 생각이 보는 내내 들었습니다.

 

2. 철종이의 잘린 머리를 보면서도 전혀 잔인하다거나, 끔찍하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건, 이 사람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서였던 거 같아요.

어느 분 말씀처럼 '뇌수가 정액으로 이루어지다시피한' 섹스머신 이상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잘린 머리를 봐도 기계의 일부분이 해체되어 틱 던져진 것 이상의 느낌 외에 들지 않는..

전혀 인간의 머리가 잘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적어도 제겐 그렇게 보였습니다.

정말 아무 느낌없이 그 잘린 머리를 뻔히 보고 있는 제 자신이 신기했습니다-_-

 

2. '니가 나한테 정 준 적 있냐고' 복남이를 개 패듯 쥐어패며 소리치는 만종이는 참...

어째 마누라 두들겨패는 남편네들은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아서'를 운운하며, '사랑받지 못한 어린애'라서 삐뚤어졌다고 우기기로 서로 짰나요?

꼭 그렇게 여자 두들겨패면서 그런 식으로 합리화를 시켜요.

'제주도 푸른 밤'의 이발소 아저씨나, 공지영 소설 '착한 여자'의 여주인공 남편이나.

하긴 언제는 이유가 있어서 팼나요. 핑계 없으면 발가락이 못생겼다거나, 뒷통수가 짱구라거나, 그냥 니가 거기 있다는 거 자체가 걸리적거려서 패는 게 저런 종자들인데요.

 

3. 다들 너무나 멀쩡한 '보통' 사람들인데, 왜 복남이에 한해서만은 그 '평범함'이 지켜지지 않는 걸까요?

아무 힘도 없고, 아무리 괴롭혀도 찍 소리도 못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래서 다른 데 나가면 더 찍 소리도 못하는 '나'같이 못나고 평범하고 힘없는 사람도 마음껏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마음껏 유린하고 학대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인 걸까요?

그래서 그들은 그 평범함을 평범하게 지킨 것 뿐일까요?

 

4. 잠시 다니러 온 경찰에게 푸근한 인심이 살아있는 시골이지만, 복남이에겐 그야말로 지옥인 무도...

어디를 가나 딱히 다를 게 없을 거 같아 더 답답합니다.

도시 내의 커뮤니티는 그 나름대로 저런 면이 있겠죠. 더하든 덜하든.

 

5. 복남이가 겪는 사건은 직접 목격하긴 어려울지 몰라도 신문지상에선 몇 달에 한번, 1년에 몇 번 정도는 쉽게 볼 수 있는 사건이죠.

십수년 전에 어느 시골마을에 아버지 없는 여중생을 마을 남자들이 번갈아가며 성폭행해서 여자애가 임신했는데,

애 아버지 찾는다고 기어이 애를 낳아서 결국은 그 마을 노인 하나가 구속됐던 사건도 있고,

정신지체여아를 마을 남자 내지는 보호자랍시고 있는 친척들이 번갈아가며 성폭행하는 건 일도 아니고.

하다못해 친딸, 친손녀, 친조카를 성폭행하는 아버지, 할아버지, 삼촌이 있는 판에,

그들의 아내들은 그걸 묵인하고, 법정에선 피해자를 고스란히 그 '가정'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판국이기도 하고요.

도대체가 탈출구는 없는 건가요.

 

6. 전 영화를 보는 내내 슬펐습니다. 복남이가 낫을 휘두를 때조차 그리 통쾌하지도 않았어요.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그냥 줄줄 눈물이 흐르더군요.

양치질 하면서, 누워서 눈을 감고도, 자려고 들어와 누워서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요.

못 견디게 가슴 아파서도 아닌데, 눈물샘을 터뜨리는 내면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처럼 그저 눈물만 줄줄 흘렸습니다.

 

아마.. 부끄러워서였던 거 같습니다.

전 제 생활의 안정이 깨지는 걸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소심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맞는 것도 겁나고, 무슨 일 당하는 건 더욱 끔찍하죠.

해원이가 처음 남자들에게 두들겨 맞다 도움을 청하는 여자를 외면하고 증언을 거부한 건 저로선 당연하게 이해가 됩니다.

내가 무슨 스미레처럼 격투기로 다져진 것도 아닌데 거기 엮이면 고스란히 함께 맞고 끔찍한 일 당하는 수밖에 더 있나요.

증언거부는 저만 아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한국의 증인보호시스템이란 것이 저 정도일 줄이야..;)

하다못해 지하철성추행범을 지나가던 '정의의 용사'가 붙잡아서 경찰에 넘겨도, 그거 증언할 생각은 안하고 그냥 도망쳐 버리는 일이 다반사인데요.

단지 '후환이 두려워서'.

 

섬에서 해원이가 증언을 못한 것도 후환이 두려워서였겠죠.

옴치고 뛰지도 못하는 섬이고, 마을 사람들은 합심협력해서 복남이를 학대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합심해서 만종이를 감싸주고 있는 판에,

거기서 사실대로 말하면 복남이의 모습이 곧 자신의 모습이 될 거라는 생각.

제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해원이와 다르진 않았을 거에요.

 

그게 부끄러웠습니다. 난 그저 방관자일 뿐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확연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어요.

어느 블로그에서 봤던 글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영웅본색'이 왜 자기 인생의 영화였었는지에 관한 글이었는데...

학창시절 학교의 부당한 폭력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그저 감내해야 됐던 때,

영웅본색을 보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선한 편'이 아닐 수도 있음을,

마크와 자호처럼 피를 흘리면서도 의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눈앞의 이익 때문에, 피흘리고 다칠 게 두려워서 뒤로 숨고 배신하는 아성이 될 수도 있음을 절감했다고.

그게 그렇게나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고 하는 글이었어요.

 

저도 비슷했습니다.

비슷한 신문기사를 보며 어떻게 그런 일을 직접 옆에서 보면서도 신고 한마디 하지 않고 그저 보고만 있냐고 질타했지만,

막상 그 입장이 되면 나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다분한 것을,

내 편의를 위해, 내 일상의 안정을 위해 눈감고 귀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고..

그래서 부끄럽고 한심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영화 마지막에 용의자를 지목했던 해원의 그 용기마저 없을 수도 있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요.

 

그러고보니.. 참 한심한 사람이군요 전...

 

덧. 다방레지가 그나마 복남을 도우려 할 수 있었던 건, 어차피 더이상 잃을 게 없는, 복남과 다를 게 없는 입장이어서였겠죠.

해원은 자신의 안온한 일상을 지켜야 하겠지만, 다방레지는 복남이 도와 도망치다 실패해도 달라질 게 없으니까요.

근데 왜 이 여자는 아이 죽었을 때 증인으로 자리에 없었죠? 배 모는 남자도 있었는데?

 

덧2. 저도 해원이 복남의 낫질을 피해 남자들과 도망치고, 그들에게 피하라고 소리치고 그 부분이 제일 짜증나더군요.

근데 그 남자들마저 없으면 자기 혼자 복남이 낫질을 대면해야되니 일단은 상부상조하자는 게 아니었을까 싶네요.

나중에 자기는 배에 올라타고 남자 혼자 잡혔을 땐 그냥 외면해버리니까요.

이건 과연 천성이 이기적이기 때문인지, 남들 다 죽어도 혼자 살고보자는 게 인간 본능이어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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