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이후, 누구와 살 것인가.

2014.09.04 21:13

잔인한오후 조회 수:2361

- 이 글은 [마흔 이후, 누구와 살 것인가] 서평 이벤트를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조금 고민을 했습니다. 세계의 가구 변화 추세를 정리해서 넣거나, 대안 공동체에 관한 책 몇 권을 더 읽고 혼합해서 쓰거나 할까 생각했죠. 전자의 경우 예전부터 모호하게 주장해왔던 한국 청년층에 동거가 증가할 것이란 것을 남미나 유럽 추세를 맞춰 따져볼까 싶었습니다. 한국에서 동거가 일반화 되지 못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집단윤리 때문인데, 그게 미혼모 / 입양아 / 저출산 / 초혼연령의 상승 등(종합적으로는 취약 아동의 사회 흡수 압박)을 바탕으로 해체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동거란건 결국, 결혼이란 사회적 협약 이전에 이뤄지는 비협약 공동 주거인데 이런 책과 함께 봐야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후자는 뭐, 예전에도 있었겠지만 요즘 부쩍 느는 비종교/비정치적 집단 공동체 관련 서적과 협동조합의 다양한 사례들에 대한 책들이 있으니 읽어볼까 했어요. ... 그런데 예전보다 할 일이 늘어서 너무 피곤하고 늘어지다가는 아예 글을 못 쓰겠다 해서 다 밀어버렸습니다. 여유가 없어지면 내용이 부실해지는건 어쩔 수 없군요. 


책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내용이었고, 그 때문에 더 좋았습니다. 정말 예상과 달랐어요. 저는 이 책의 부제가 '세 여자의 유쾌한 실험, 그 10년의 기록'이어서 기본적으로는 종단 패널 조사 보고서 정도를 생각했어요. 10년 간 진행된 일들을 1년 단위 등으로 시간 순으로 배열해서 어떻게 진행되고 굴곡이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거죠. 하지만, 이 책에서 그 부분은 거의 1/4 정도고, 절반 정도는 같이 살기 이전에서 같이 살기까지 해야 되는 일들을 설명하고 나머지 1/8은 같이 살면서 있을 수 있는 문제들을 어떤 식으로 해체해야 하는지 다루고, 1/8은 독자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을지 판별하는데 쓰고 있죠. 네, 이 책은 반 정도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죠. 저는 그런 부분들이 상당히 명쾌해서 많이 설득 당했습니다. 


그 전까지 함께 살지 않았던 사람과 함께 살게 되는 일은 정말이지 많은 준비가 필요한 일입니다. 결혼에서도 혈연과 혈연의 결합에 가려져, 두 명이 한 공간에서 살게 되는 것임을 간과할 때도 있는데 이 책에서는 결혼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면밀하게 [함께 사는데 고려해야 할 것]들을 아주 자세하게 다룹니다. 하나 하나 따져나가는데 정말이지 오랫동안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듀게에서도 가끔 엉뚱하게 갑자기 같이 살아야 되는 사람이라거나, 종교 전파를 하는 가족, 정치적 견해가 다른 상황 등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죠. 사실 누군가와 함께 살기 전에 그런걸 냉정하게 꼼꼼히 따지기는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냉정하게 꼼꼼히 따져요. 아, 정말 감탄했습니다 또는 제가 아직 그런 행정 처리와는 거리가 먼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설명으로는 전하기 힘드니 몇 부분을 발췌해봅니다.

서로 도움을 주려고 애쓰는 게 서로를 가장 짜증나게 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해보았겠는가? 결과적으로, 우리는 정말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나 상대가 도움을 요청할 때만 돕는 것이 가장 좋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하지만 다소 어려운 문제는 누군가 어떤 일을 하는데 돕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게으름을 피우거나 자기 몫을 다하지 않고 있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집단으로 생활할 때 생기는 흔한 문제 중 하나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이렇게 말하면 된다. 

"도와주지 말아줘, 부탁이야. 고마워."

누군가와 친하다는 것은 저로서는 그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고, 신뢰한다는 것은 그가 독자적으로 행동할 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예컨대 제가 막나가고 있어도 그가 아무 말하지 않는다면 그가 속으로 '아 저 머저리'라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그런 막나가는 행위가 허용되는 것임을 뜻한다는 것이죠. 과한 행동을 했을 경우, 제재하는 것을 멈칫거리지 않고 확실히 할 것이라 신뢰할 수 있는 관계, 라는게 건강한 관계라고 생각하죠. [상대가 도움을 요청할 때만], 그리고 그 이전에 ["정말"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상대의 삶에 개입하는 것. 그리고 상대가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움을 요청"하리라 믿는 것,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지요.

'개인공간 물품들(Personal Space Items, PSI)이란 말이 다소 완곡한 표현처럼 들리지 않는가. 정말 그렇다. 우리는 세 사람의 물건을 정리하면서 절대 들이고 싶지 않은 물건을 만났을 때 "절대 안 돼!"라는 말 대신 조금 친절한 이 단어를 쓰기로 했다. 주인에게는 소중할지 모르지만 다른 두 사람의 취향과 맞지 않는 물품이 꽤 많았다. 우리는 그러한 물품들과 솔직하게 정면으로 부딪쳤다.

3인분의 짐을 한 집으로 몰아 넣는다면 버려야 할 짐들이 몇 더미는 나올 것입니다. 무엇을 배제하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특히 자신과 남이 동시에 그걸 고려해야 한다고 할 때 속이 상할 가능성이 높겠죠. 누가 무엇을 정말 아끼는지는 함께 살아도 알기 힘들 때도 많습니다. 누군가의 별것 아닌 것 같은 물건을 잘못 훼손했다가 가볍게 이야기하고 관계가 엉망이 될 수도 있죠. 그렇다면 소유를 잔뜩 버려야 할 때는? 싸워도 몇 번을 더 싸웠을 일들을 이런 식으로 느슨히 넘어갈 수 있더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갈등이 없진 않았겠습니다만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가 아니다:

·결혼 관계가 아니다. 

·가족 관계가 아니다. 

·사업 관계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이다: 

·협동주택의 공동주거인 관계이다. 

·공유 재산권을 가진 명의인들이다. 

·공동담보대출 소유자들이다. 

·개인 이익과 상속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협동주택 파트너십 협약서 상의 파트너들이다. 

·가까운 친구들이다.

서로의 경계를 잘 그어야 한다는 이야기 와중에 나온 관계 설정입니다. 다른 것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특히 [이러한 관계가 아니다]는 부분이 눈에 띄더군요. 이 책에서는 '경계'라는 단어를 썼지만 한국에서는 '선을 긋는다'는 표현이 있죠. 누군가와 함께 살긴 하지만 '남편/아내'도 '가족'도 '회사동료'도 아님을 생각하며 선을 긋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계가 훨씬 안전하고 편안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죠. 그렇게 생각해보면 혈육은 가족이나 친척이라는 생득적 이유로 더 깊게 개입하거나 할 수 있으며, 그로써 더 면밀하게 다가가거나 더 크게 상처주거나 하겠죠. 다만 그게 그저 주어졌을 뿐이므로 더 조심해서 다뤄야하는 소중한 권한이란건 고려하기 어렵기도 하구요.

만약 한 파트너가 사망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소액 생명보험을 통해 보호받는다. 우리 각자는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을 수령인으로 하여 생명보험에 가입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한 파트너가 사망한다 하더라도, 남은 사람들은 재정적 비상사태에 처하지 않을 것이고, 파트너의 생활비가 갑자기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큰 문제 없이 새롭게 조정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여러가지 가능성 있는 파국 중에 하나를 해체하는 방식입니다. 이건 누군가가 사망했을 때이죠. 공동 구매한 주택은, 공동담보대출을 가정하고 있으며 매월 전부 1/3을 납부합니다. 그렇다면 그 납입기간이 끝나기 전에 갑자기 누군가 더 이상 납부가 불가능하다면? 그런 상황에서 나머지의 재정이 흔들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대비를 이런 식으로 꼼꼼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행정적인 대비는 다른 무엇보다 그것을 해놓았음으로 해서 더 이상 거기에 대해 생각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죠. 이 책의 말미에 '협동주택 파트너십 협약서'가 있는데 조목 조목이 아름답습니다. 마치 국가가 생기기 위해 제헌을 하듯, 공동체가 생기기 이전에는 꼼꼼히 협약을 준비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어떠한 차이들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어떠한 행동들은 수용 불가능하다. 

·어떠한 경계 침범은 반드시 관계의 끝을 가져온다. 혹은 최소한 함께 살겠다는 협약의 파기를 가져온다.


한번 균형 상태가 와해되면, 상호의존(codependecy,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그것을 베푸는 사람 사이의 지나친 정서적 의존성을 가르키는 심리학 용어) 패턴과 조성행동(enabling, 누군가를 도와주고 있지만 사실상 그를 파괴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이 나타날 수 있다. 즉, 한 파트너가 다른 파트너의 결핍에 대해 과잉 보상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불균형이 더 심화되거나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알아둬야 할 점이라고 나열한 명제들을 소개해드립니다. 아아, 이 부분을 읽으며 저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얻은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타협 불가능한 공간, 경계를 넘으면 [반드시] 끝이 오는 선, 수용 불가능한 행동. 그런 것들은 폐쇄된 계 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생명체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있다는 것이었죠. 그런게 있을리가 없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파국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겠죠. 누르지 말라고 써져있는 단추를 누르는 순간, 불가역적으로 관계 단절을 향해 진행되고 그 과정은 절대 멈출 수 없는 그 무언가도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게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잘 드러나지 않을 뿐.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의 진행이 잘 써져있죠. 상호의존이야 잘 알려져 있지만, 조성행동은 저도 처음 들어본 용어였습니다. 분명 어렴풋이 저런 상황들이 있고, 그런 상황에 자신이 말려들어간 것을 자각할 수도 있지만 저런 용어가 있었다니. 아무래도 조성행동Enabling을 따로 더 알아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을 파괴시키기 위해 행하는 행동들보다, 저런 행동들이 위의 상황이 일어났을 경우 더 파국으로 치다르게 만들 가능성이 있을테니까요. 관계 회복을 위해 경주하는게 관계 파국을 더 가속화시킨다거나 하는 경우 말이죠.


개인적으로 이와 비슷한 상황에 걸려들었을 때 되뇌는 속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기적이다, 나의 행동은 이기적인 목적에서 행해졌다. 나는 이기적이다.' 뭐 이런 식입니다. 자신의 행위의 이타성을 찾을 때, 실제로 순수한 이타라면 남에게 요구하는 바가 남아있을리 없겠고, 돌뿌리처럼 걸리적 거리지도 않겠죠. 일종의 보상심리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 때, 그리고 그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남에게 그 보상을 요구할 때 개전이 확전이 될 수도 있겠죠. 수고를 내어줬다는 생각에 심하게 감정이 상할테니까요. 행위가 이기, 즉 자신이 무언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얻기 위해서 했다고 생각한다면 남에게 뭔가를 더 달라고 요구하는건 어이가 없는 일이 되죠. 그리고 발췌된 위의 3가지 명제들로 인해, '심지어 내 자신이 이타적이라고 생각했던 행위'마저 타자를 안 돕진 않을망정 파괴시키는 행위일 수도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타라고 해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이죠. 더욱 겸허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마무리가 이상하지만, 뭐 어쨌거나 이러한 식의 누군가 함께 살 때 고려해야 되거나, 고통스러운 상황들에 대해 그들이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가 잔뜩 나와 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우리들처럼 해"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변호사도, 상담가도, 재무사도 아니니 우리처럼 하지말고 혹시 하려고 한다면 재무사, 상담가, 변호사를 찾아가 꼼꼼히 상담 받으세요"라고 하죠. 무언가 좋은 일이 있다면 그 일을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 서술 내지 설명을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을 선택하느냐 마느냐는 남에게 온전히 맡길만한 것이죠. 그리고 그래야만 남도 온전히 책임을 질테니까요. 참, 제겐 괜찮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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