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일곱 살, 저는 예고 2학년 생이었고 정명훈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저의 재능과는 전혀 무관했고요. 

그저 우리 학교의 합창단이 뮤지컬에 참여하게 된 게 계기였죠.


처음에는 그와 함께 무대에 오른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는 여고생 들에게 그가 어느 정도의 존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하지만 정명훈은 워낙에 바쁜 스타 지휘자였기에 연습 기간 동안은 조금 레벨이 낮다고 여겨지는 

- 지역 합창단을 지휘하고 계셨던- 선생님과 함께 연습했어요. 

마에스트로가 한국을 방문하는 딱 3일간, 리허설을 맞춘 후 무대에 올라가는 일정이었죠.


뮤지컬의 주제는 어미 돌고래와 아기 돌고래가 바닷 속 오염 때문에 죽어가는 슬픈 스토리-_- 였어요.

주인공은 'N' 씨 였고, 우리는 그저 뒷 배경에서 플랑크톤도 되었다가, 바다에 폐기된 쓰레기도 되었다가

그렇게 왔다갔다 하는 역할이었습니다. N씨는 잘 알려진 뮤지컬 배우는 아니었지만, 

목소리는 너무 곱고 고와서 그저 반할 수 밖에 없었어요.

언니, 너무 예뻐요. 언니 사인해 주세요. 하면, 너희가 더 예뻐. 나한테 사인이라니,,,하며 부끄러워 했죠.

연습은 쉽지 않았어요. 처음엔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이게 여간 어렵지가 않은 거예요.

나의 정체성이 연약한 플랑크톤 부터 나쁜 쓰레기 까지 널을 뛰는데, 가사 외우기도 쉽지가 않더군요.

(프롬프터가 있긴했지만)

게다가 우리는 어설픈 춤도 강요 받았어요!

플랑크톤일 때는 흐느적 흐느적, 쓰레기일 때는 위협적으로 움직여야 한대요.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고 움직였지만요.


결국 이 쉽지 않은 연습 시간 동안, 우리는 합창단 지휘자 할아버지와 너무 많은 정이 들어버렸습니다.

아이들이 삑사리를 내거나 가사가 틀려도 백발 버리가 근사했던 그 분은 한번도 우리를 나무라지 않았어요.

-이건 여러분들에게 그저 아주 좋은 행운일 뿐이에요.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즐겁게 경험하세요.-

'누구도 너희들을 실력으로 판단하지는 않을거란다' 이 말은 가사가 입에 안 붙어 자꾸 틀리는 내게 위로가 되었죠.   

마에스트로를 만나러 세종문화회관으로 떠나는 날에도 그 분은 아주 품위있게 우리에게 인사를 건냈어요.

'마에스트로와 함께 행복한 공연이 되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미소를 지으셨죠. 

그 덕에 정명훈과의 공연을 부푼 가슴으로 기다렸던 처음과 달리, 몇몇 아이들은 눈물까지 흘렸어요.

"왜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한 선생님은 그 무대에 오를 수 없는거지?"

"이건 너무 불공평해"

물론 지금에서야, 순수한 시절의 치기라고도 생각할 이야기겠으나.



어쨌든, 수천 명의 관객석이 내려다 보이는 무대에서 마에스트로와의 만남은 놀라웠어요.

첫인상은 조금 무서웠지만, 그의 말투와 태도는 아주 젠틀했어요. 너무 부드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친절 하지도 않았어요. 

그의 지휘에는 묘한 카리스마가 확실히 있었답니다.

노래 첫 음절을 아이들이 저마다 다르게 시작하자 그는 손가락 짓 한 번으로 우리의 속도를 맞춰줬어요.

그동안은 그렇게 연습해도 다 달랐던 첫 소절인데, 

그야말로 마법같은 경험이었습니다. 그의 손짓과 눈빛을 따라가다보면  어느덧 우리의 하모니는 완성돼 있었으니까요.

오케스트라가 오지 않을 때는 그의 피아노 반주로 연습했어요. 피아니스트로 유명세를 알렸던 그 답게,

전주 몇 소절 만으로 아이들은 '와'하며 넋 놓고 듣고 있었죠. '이렇게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건 영광'이라는 관계자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죠. 


연습 시간에 아이들은 지휘자 석을 기웃댔어요. 혹시 싸인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죠.

노트를 들고 쭈뼛 거리는 아이들에게, 마에스트로가 말했어요.

'사인은 지금 해줄 수 없지만, 사진을 찍는 건 괜찮다'고요. 그 말을 필두로 아이들이 우르르 줄을 서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요. 다행히 그는 모두에게 상냥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해주었고, 그 날의 사진은 

다이어리를 잃어버리기 전까진 아주 소중히 보관해두었습니다. 


공연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나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엄청난 관객과 귀가 떨어질 것 같은 박수, 오케스트라의 반주와 매섭게 우리를 노려보며 컨트롤 하던 

마에스트로의 눈빛까지...

어쨌든 막이 내려가는 그때, 그는 관객들의 인사를 받은 후 우리에게 손짓을 해 플랑크톤과 폐기물들도 

인사를 받을 수 있게 도와줬어요. 사실 인사는 한 번도 맞추지 않았기에, 아이들은 얼떨결에 여기저기서

고개를 숙였죠. 딱 그 순간 만이, 우리가 박자를 놓치고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흐르고, 나는 그런 일이 있었단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어요.

음악을 그만두고 파리의 가난한 유학생이 되어 길을 헤매고 다녔죠.

어느 날, 다소 부유한 16구에 살던 친구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어요. 김치가 먹고 싶다는 친구 말에

한국 슈퍼마켓에 들러 배추 김치를 조금 샀죠. 봉투에는 'XX 한인 마트'라고 크게 쓰여있었고, 나는 

잘 사는 동네에서 그런 냄새나는 봉지를 들고 있는 게 좀 창피했어요.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순간,

옅은 회색인지 하늘색인지 잘 구별이 안가는 아우디 오픈카 한 대가 내 앞을 지나갔어요. 그런데 제 바로 앞에서

살짝 서더니 얼굴을 한 번 돌아보는 듯 한 기분이 들었죠.

선글라스를 쓰고 달리던 그는 바로, 마에스트로였어요.

분명히 내게 인사를 한 건 아니었고, 그때의 나를 기억할리도 만무해요. 

그저 한국 글씨가 쓰여진 봉투를 든 사람을 본능적으로 돌아보게 되는 게 고국의 힘일테죠.

그에게는 그저 한 순간의 지나침이었겠지만,

그 순간 저는 잊고 있었던 무대의 기억이 떠올라 뭔가 치미는 기분이었어요.

친구와 함께 라면과 김치를 먹으며, 한 때 그랬었던 적도 있었던

뭐 그런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했죠.


고국으로 돌아 온 후,

나는 클래식 보다는 재즈를 즐기는 사람이 되었고

공연과는 수 만리 떨어진 삶을 영위하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옛날 뮤지컬 배우로 기억했던 N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나윤선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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