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23 22:25
때로 마음이 저민단 건 전혀 생각도 못 했던 순간에 쳐들어오죠.
내 눈물에 내가 놀라는 순간 말예요.
연휴의 끝인 어제 전 애인과 애인의 어머니 집에 놀러 갔어요. 몇 년간 봐온 그의 어머니인지라 가족사나 기타 등등 집안 사정에 대해서도 애인이나 다름없이 알고 있는 처지였죠. 6년 전에 남편을 병으로 떠나보내고 자식이라곤 아들 하나. 그런데 그 아들이 가슴으로 품은 자식이에요. 아이가 없단 걸 소문으로 들은 것인지 여기 어머니와 알고 지내던 누군가인지 모를 누군가가, 갓난아기인 제 애인을 문 앞에 두고 잘 키워주시기 바랍니다 이 죄는 평생 속죄하며 살게요 아이 생일은 모월모일입니다 라는 쪽지를 넣어놓고 갔다더군요. 아무튼 저는 그렇게 그의 방에서 그가 취미로 작업한 음악을 들어보고 있었고 그는 소파에 앉아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고 있었어요. 예의 그 발바닥을 방바닥에 꼭 붙여서는 질질 끄는 발걸음 소리를 내며 그의 어머니가 거실로 나와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 집에 가야되는데.....“
아들은 망연히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엄마. 라고 외마디 탄식을 했고 어머니는 다시 아들을 향해서 “나 집에 가야되는데. 누구세요?‘ 라고 조용히 웅얼댔어요.
전 방에서 뛰어나가 최대한 다정한 얼굴과 눈빛으로 그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손을 잡았고, 이어서 우리 젊은 사람들도 전화기를 들고서 전화기를 찾질 않나 지갑으로 음식 값을 치르면서 지갑을 찾질 않나 저희 어머니께서도 오늘이 며칠인지 항상 잊는다 등등을 말씀드리고 괜찮다...괜찮다... 연세 드신 분들 다 그러신다... 오늘 어머니께서 꿈을 꾸셨나봐요 하하하 따위를 말씀드리는데. 속이 자꾸 울렁거렸어요. 게다가 자꾸만 등이 아프더라고요. 전 슬픈 마음이 들면 이상하게 배가 아프고 식은땀이 나는 인간인데, 어제는 배가 아프다 못해 등도 아프더라고요.
얼마전부터 자꾸 이불속에 넣어놓은 현금이 없어졌다는 얘길 자주 하시고, 집에 도둑이 들어왔다, 통장이 없어졌다, 아들이 훔쳐갔다, 애기가 (애기는 저예요) 집에 와서 내 영양제를 훔쳐 먹었다 같은 얘기를 자주 하셔서..... 안 그래도 보건소에서 하는 치매선별검사를 받게 해드리라고 애인한테 말했었거든요. 그런데 새로 옮긴 직장이 무척 바쁘고 야근에 출장이 잦아서 애인이 계속 미뤘었죠. 언제나 TV만 보시는 분인데다가 취미 생활도 없으시고.... 늘 집에 혼자 계시는 시간이 많은 분이라서 치매가 오기 좋은 환경이다란 생각은 저도 자주 들었었어요. 갓난아기 때 이미 부친은 돌아가시고 여기 어머니 남매를 데리고 세상을 살아가기엔 힘들고 무서웠던 모친은 재가를 하셨대요. 그래서 여기 어머니 남매는 큰아버지댁에서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두메산골 허드렛일은 죄다 하며 유년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소학교도 제대로 못 마쳤고.... 소처럼 일만 하던 산골 처녀는 19세에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을 갔고. 그 집엔 남편의 형제가 일곱. 시부모와 남편, 남편의 형제들 뒷바라지 살림을 하던 여기 어머니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지금 저의 애인을 업어 키웠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대요. 종종 무릎을 꿇고 식사를 하는, 좋다 싫다를 평생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해본 적이 없는 이 분을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까요....
너무 마음이 아파요.
사실 전 여기 어머니와 그리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고 서로 주고받은 것 없이 왕래하며 가끔 인사드리고, 모시고 나가서 함께 식사를 한 것이 전부인 처지지만..... 저 자신도 이 감정이 당황스러울 만큼 한 인간으로서 그녀의 박복함에 가슴이 아프네요. 사연이 구슬픈 걸로 치자면야 우리 어머니들 세대에 누구 하나 가엾지 않은 분이 계시겠습니까만....
일단 당장 애인이 내일 보건소에 모시고 나가서 1차 치매선별검사 받고, 2차로 보건소 협약 거점병원에 정밀 검사 받고, 진료와 치료를 병행할 생각인데요. 2차 정밀 검사나 요양원 문제나 치매 관련 어떤 작은 직간접 경험이라도 댓글 부탁드립니다. 나누기 어려운 경험이시겠지만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려요. 인터넷 검색과 지인들 정보 수집으로 최대한 정보를 많이 얻어야할 것 같아서요. 저희 부모님은 아직 정신이 맑으시고 저희 친족 중에는 치매 관련 병력이 전무한지라, 게다가 제 주변 친구들이나 지인들 중에도 아무도 없네요. 아픈 기억이시겠지만 혹시라도 나눠주실 수 있으시면 정보 좀 부탁드릴게요. 이렇게 치매의 뚜렷한 징후를 갑자기 마주쳤을 때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2.23 22:30
2015.02.24 00:28
2015.02.23 23:28
1. 우선, 도움이 될만한 얘기는 못해드려 죄송
2. 토닥토닥. 본문을 보니 잘 대처하실 듯.
3. [행복했대요]에 눈물이 날뻔 했지만 참았음. 어째서인지, 누군가의 입으로 전해듣는 행복했다더라는 전언을 접하면 늘 그래요. 과거형이라서 그런걸까..
2015.02.24 00:32
2015.02.24 00:07
너무 무겁고 진지한 사연이라 답글 달기도 저어되지만... 조금 용기를 내 봅니다. 그런데 제가 짚고 싶은 건 은생님이 현재 애인분의 애인일 뿐, 며느리가 아니신 듯 하니 향후에도 애인으로만 존재할 지 결혼을 염두에 두고 계신지 그걸 잘 모르겠어서요. 이걸 왜 짚냐하면, 이 한끗 차이가 그 죄없고 가엾은 (의붓)어머님의 치매 치료 및 기타에 조금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얕은) 생각에요. 쓰신 글로만 유추하건대, 평소 일상성을 유지하시다가 간헐적으로 경미한 치매 증세를 보이시는 상황이라면 일단 받을 수 있는 검사는 받아보는 걸 권장하고요. 일상과 치매 확률이 8:2나 7:3 정도만 돼도 누군가 상주하면서 집중케어를 하지 않아도 틈나는대로 체크하고 대처하는 걸로 당분간은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어머님 연세가 어떤지 몰라도, 노환과 겹친 치매증상이라면 이 경우엔 24시간 또는 최소 12 시간 이상을 옆에 붙어서 체크하고 케어해야 하는 상황이지 않을까 해요. 왜냐면 대소변을 당신 스스로 수습할 수 없는 경우라면, 정말 심각할 수 있거든요. 병의원에 모시고 가서 검사를 받고 결과를 받는 거랑은 다릅니다. 누군가 옆에서 계속 돌봐야 하거든요. 가족이나 친지 중 누가 전담할 수 있다면 불행 중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그것도 가족간의 불화가 될 수 있고요(이게 일회성 질환이 아니라 오랜 시간 꾸준히 돌봐야 하는 것이라), 요즘엔 방문형 요양보호사 제도가 있다고 하니 알아보셔도 좋겠고요.
앞서 말씀드렸듯 치매는 단발성의 질환으로 한 두 번의 치료나 수술로 끝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한, 아주 까다롭고 어려운 질환이라 누구라도 지극한 인내심이 아니면 쉽지 않더라구요. 그리고 공을 들인다고 호전되는 게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더더욱 암담한. 어쨌든 은밀한생님의 마음 조금은 알 것 같고요, 아주아주 경미한 전조라 크게 지장 없으시길 바라고 속히 호전되시길 빕니다.
2015.02.24 00:44
2015.02.24 00:53
에고고, 댓글 쓰고나서도 제가 무슨 전문 의료인도 아닌데다, 주제넘게 결혼을 염두에 뒀느냐 마느냐 혹여 불편하게 읽으시지 않았을까 조금 맘이 쓰였는데 오해하지 않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결혼 유무를 언급한 것이, 며느리가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전적으로 병수발 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치매라는 질환 자체가 일이회성 수술이나 치료로 끝날 문제가 아니기에, 단지 애인의 입장에서 전심으로 돕고 싶다 라는 진심이 뒷심을 발휘하기엔 조금 힘드시지 않을까 하는 좁은 소견 때문이었거든요. 뭐 어쨌든 정식 가족으로 엮이고나면 싫든 좋든 담보해야 하는 어떤 지점이 분명히 생기고 그것이 다 극진하진 않지만, 어떤 의무와 결과 부분에서는 차라리 명쾌하기도 하다는 걸 측근에서 저도 봤기에 드린 말씀인데... 그 정성스러운 마음 어머님께 잘 전달되어 좋은 경과 있으셨으면 하네요. 기운내세요.
2015.02.24 01:33
2015.02.26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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