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다녀왔습니다. 최고봉이라는 천왕봉을 올랐지요. 무려 1915미터. 한라산 백록담이 1950미터라니.. 등수로 따지자면 2등이지만 육지에서는 1등이죠. 


1천미터가 넘는 산은 대개 힘든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대충 올라가면 되려니 생각한건 아니고.. 실은 한달 반전부터 준비를 하긴 했어요. 스쿼시도 다시 시작하고 체중도 2킬로쯤 줄였습니다. 이게 다 중년들의 객기 비슷한 말때문에 시작된 일인지라. 


친하게 지내는 대학 동창 셋이서 술을 한잔 하다가.. 아직 제가 지리산에도 못가봤다 했더니 다른 두 녀석이 자기들은 다녀왔다고.. 그게 뭐 대단한거라고. 그런 뉘앙스의 이야기를 한적이 있어요.그래서 그렇게 어려운게 아니라면 같이 한번 가자.. 그래? 그러면 날잡자? 그래? 그러면 이날에 이렇게 해서 가는거다.. 라고 시간이 흘러가며 차곡차곡 날짜가 다가오고 구체적인 계획안이 나오고 아무도 다치거나 급한 출장이 잡히거나 발을 빼는 사람이 없어서 끝까지 가게된 것인데. 


이를테면 누가 하나 일이 생기면 몰라도.. 나는 그럴수 없지.. 라는 식의 치킨게임이었다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덕분에 인생의 추억 하나가 생겼지요. 


주말이라고 집에서 놀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하는 일이 있어 평일에는 빼지도 못하는 시간을 탓하며 무박 2일의 계획을 짰습니다. 중산리에서 올라 백무동 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 빠르면 일곱시간 아무리 느려도 열시간이면 가능하다는 코스였습니다. 남부터미널에서 밤 11시 30분에 출발하는 중산리행 버스를 탑니다. 도착하니 새벽 3시. 랜턴을 켜고 산을 오릅니다. 별들이 무척이나 많군요. 하늘에 빼곡한 별을 보는것만으로 무리해서 온 데 충분한 보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턱까지 올라오는 숨을 참아가며 산을 오릅니다. 중산리 코스가 매우 어려운 코스라는걸 친절하게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어 한번 좌절하고.. 올라가면서 저질체력을 탓하며 또한번 좌절. 그래도 한참을 올라가니 뿌옇게 사위가 밝아옵니다. 천왕봉 일출은 언감생심 생각도 못했는데 7부 능선쯤에서 해가 뜹니다. 산에서 맞이하는 일출이 거의 인생에 처음인데.. 정상이던 능선이던.. 아름답더군요. 순식간에 밝아오는 하늘이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날씨만 도와준다면.. 겨울이 되어갈수록 천왕봉 일출을 볼 확률은 높아진답니다. 산신령급 등정이 아닌다음에야..중산리로 가면 4시간은 잡아야 할텐데.. 그러면 갈수록 해가 늦게 뜨는 겨울철이 해맞이에 유리해지고.. 상대적으로 지금은 좀 불리한 시기. 일출 보러 가시는 분은 참고하시길. 


천왕봉에 올라 인증사진 몇장을 찍고.. 다시 되짚어 내려옵니다. 바람이 무척이나 쌀쌀하게 얼굴을 때리더군요. 장터목 대피소를 지나 백무동 계곡으로 하산길을 잡았는데.. 세상에 가도 가도 가파른 돌계단이 발목을 잡습니다. 발바닥에 문제가 있는 저와 무릎에 문제가 있는 또 다른 친구가 하산길의 시간을 더블로 잡아먹어 내려오는 시간이 예상보다 두시간 더 걸렸네요. 아무리 느려도 열시간이라는데.. 저희가 딱 열시간이 걸렸습니다. 내려가는 중간에 계속 앞질러 가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지만 도저히 속도를 올릴 수 없는 하산길. 그나마 다 내려와서 막걸리 한잔 하니 비가 쏟아졌어요. 다행도 그런 다행이 없죠. 


백무동 계곡으로 내려오면 야영장이 하나 보이고 깔끔한 펜션과 음식점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리고 한 5분쯤 내려오면 버스 정류장이 있더군요. 동서울로 오는 버스가 4시 5시 6시에 있어서 저희는 17시 차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막힐법도 한데 기사님이 아주 길을 잘 아시는지 출발한지 4시간 반만에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몸은 조금 피곤하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만족스러운 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산에는 왜 가는가?? 라고 늘 외치고 다니는 저였고 그 생각에 별 변동은 없습니다. 몸이 고생한 기억이 남아있고 산에서 좋았던 기억은 꿈결처럼 이미 잊혀져 가고 있어요. 하지만.. 인생이 한권의 책이라면 지리산 천왕봉에 무모하게 다녀온 챕터 하나쯤은 끼워 넣어야 내용이 별거 없는 책이라도 재미면에서는 업그레이드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좀 들고.. 기왕이면 다음에는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는 건 또 어떨까 하는 생각도 슬슬 자리를 잡습니다. 


중년이든 청년이든.. 지리산이든 설악산이든.. 이 가을이 다 가기전에 어디 가까운 산에라도 한번 다녀와보세요. 인간은 어쩌면 스스로를 힘든 지경에 몰아넣은 기억으로 일상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그런 동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이번 산행에서 제가 얻은 교훈이랄까, 꼰대질을 할 소재랄까.. 그런 것 같습니다. 다들 행복한 한주 되시길. 


혹시 온라인으로도 지리산의 정기를 나눌 수 있다면 이 글을 재미있게 읽고 관심 가져주신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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