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끼 단편 하나

2015.11.09 20:38

푸른나무 조회 수:753

오래전에 쓴 글이 그렇게 낡지 않았다는 생각에 놀랄 때가 있어요. 소설을 읽을 시간을 통 낼 수가 없는 즈음이라서 겨우 단편을 가끔 읽고 있어요. 어제는 고리끼의 '스물여섯과 하나'. 나이가 들어선지(그렇게 핑계를 대고 편견을 적자면) 이건 작가가 경험하지 않았다면 못 쓸 작품, 이라고 짐작하게 되는 작품들이 더러 있어요. 어떤 묘사들과 심정에 스민 희미하지만 분명한 분위기, 그러나 보이지 않는 벽처럼 견고하고 단단해서 암담한... 역시나 고리끼가 빵공장에서 일했던 시절에 빚진 소설이라고 하니 이해가 됩니다.


[우리는 스물여섯 명의 인간, 아니 축축한 지하실에 갇힌 스물여섯 개의 살아있는 기계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반죽을 개서 크렌젤리나 둥근 비스킷을 구웠다. 우리 지하실의 창문은 창문 앞에 파인 웅덩이를 향해 있었는데, 웅덩이에 둘러쳐진 벽돌들은 습기로 인해 퍼렇게 되어 있었다. 창문틀 밖에는 가는 철망이 처져 있었고, 밀가루 먼지가 가득 낀 창문을 통해서는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 주인이 창문을 철망으로 막아버린 것은, 우리가 그의 빵 한조각을 거지나 일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우리 동료에게 줄까 하는 노파심 탓이었다. 주인은 우리를 좀도둑이라고 불렀고, 점심에는 고기 대신에 썩은 내장을 던져주기 일쑤였다...]



첫 문단을 써봤어요. 스물여섯 명의 남자들은 빵을 굽기 위해 지하실에 갇혀 지내죠. 아침 다섯시에 일어나 열시까지, 반죽을 개고 빚고 화로에서 빵을 굽고. 너무나 일을 증오해서 결코 자신들이 직접 만든 빵을 먹지 않을 정도로 노동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같은 건물의 수예점에서 일하는 어리고 예쁜 아가씨는 날마다 들러서 그들을 '죄수아저씨'라고 부르면서 빵을 얻어가죠. 그것 말고는 이들에게 기쁨이 없어요. 온갖 욕설과 상스러운 이야기를 자기들끼리 나누지만 이 아가씨에게는 그러지 않아요. 그리고 뭐, 어떤 남자가 오고, 그 남자는 유쾌하고도 자랑스럽게 자신이 여자들에게 너무나 인기 있음을 자랑하고, 어느 날 어딘가 발끈한 제빵사 중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도발을 하고, 거기에 자존심이 상한 남자가 응하고. 그래서 그 어리고 예쁜 아가씨는 유혹의 시험대에 오르는 거죠. 그걸 스포츠 삼아 스물여섯 명의 남자들은 흥분을 나누지만(세상에, 이 남자들의 그런 상태를 이용해 주인이 작업량에 몰래 반죽을 늘렸다는 문장도 있더라고요ㅠ), 한편으로는 절대로 자신들의 희망이 꺽이지 않을 거라고 북돋고....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스물여섯과 (다른) 하나. 뭐 그들이 그러는 심정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그러면서도 딱히 명쾌하거나 마음에 들진 않는데, 스물여섯이 처한 '바닥'은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지하실 빵공장에서 보내는 날들의 절망감도 견고하고 단단하게 고여 있더군요..


오래 전에 몇 년을 살았던 집은 창밖으로 담쟁이 덩굴이 보였어요. 눈을 들면 건물의 한쪽을 덮은 담쟁이가 계절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게 보였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는구나, 그리고 겨울. 몇 년을 그 담쟁이 풍경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인식했어요.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부는 날씨들도 지나가던 공간. 그 시절이 좋았던 것 같아요. 계절이 연속적으로, 부드럽게 이어져서 가는 것을 누리며 살던 시간들. 소설을 읽다가 생각났어요, 오래전에 떠나온 공간과 시간이.


아주 어릴 적에 고리끼의 이보다 더 유명한 소설 '어머니'를 읽은 적이 있어요. 물론 거의 기억은 휘발되었으나 '대단하다'는 느낌만은 남아 있습니다. 단편을 읽고 나니 '밑바닥에서'라는 희곡도 읽고 싶어지더군요.


우울한 날들입니다. 듀게에 가입하고는 몇년이 줄곧 우울한 시절이라, 대체로 우울한 글들만 써왔습니다. 언젠가 좋은 시절도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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