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사이,  듀게에 두 번 가입하고 한 번 탈퇴해봤습니다.

아마 지금 사용하는 아이디는 닉네임을 한 번 바꾼 걸 거에요.

어쨌거나 며칠 전 뻘 글을 쓰면서 여러 분의 관심(과 걱정)을 받았는데, 저를 위험한 상태의 인간이라고만 생각하시더군요. 


온라인에서 글을 쓸 때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히 듀게에서도 그랬더랬어요.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선지 지워버린 글들은 저 자신도 두 번 읽을 수 없는 법인데요, 

아침에 하드 정리를 하다가 몇 년 전에 듀게에 썼던 이 글이 하드에 남아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 때 댓글을 다셨던 (네임드)닉네임들이 지금은 보이지 않네요.


이 글을 읽은 기억이 있는 분들 계시면 손!  ㅎ

******* 


- 믿기지 않는 얘기겠지만 



 제 심장은 작은데다 보라색을 띠고 있습니다.  4 년 전 겨울 몹시 추운 날 여행길에 올랐다가 누군가와 세게 부딪치는 바람에 땅에 떨어진 적이 있기 때문이죠. 그때 잘 치료해 넣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채 손상된 그대로 지금껏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 심장이 떨어졌던 곳은 사람들로 붐비던 서울역 광장 계단 위였습니다. 진눈깨비가 실밥처럼 풀풀 흩날리던 날이었죠. 역사로 올라가는 두번 째 계단참에 간이 꽃집이 있었는데,  한 남자가 팔리지도 않는 언 꽃들을 늘어놓고 하염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더군요. 흐린 날씨 탓인지 튤립이며 장미의 붉은 색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습니다. 평소에도 그 꽃들의 볼륨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날따라 꽃잎의 도톰한 두께에 마음이 한없이 기울었습니다. 어쩌면 떨어지기 전에도 제 심장은 작고 부실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도톰한 튤립의 꽃잎에 마음이 끌렸던 것인지도. 


어쨌든 제 심장이 떨어진 건 서울역사로 들어가는 두번 째 계단참 꽃집 앞이었습니다. 살까 말까 망설이며 붉은꽃잎에 홀려 있는 저를 너댓 명의 행인이 사납게 부딪치며 지나갔고, 한순간 심장이 땅으로 털썩 떨어졌습니다. 떨어졌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못 보고 그냥 지나쳤어요. 몇 사람만이 저 대신 아아, 안타까워하는 탄식의 소리를  내었을 뿐. 


이 무슨 꿈일 수도 없는 사건일까? 하는 멍한 충격 속에서 저는 심장을 주워들고 가만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추위에 줄어든 심장은 보라색으로 질려 경련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눈 가까이 대고 자세히 들여다 보았을 때, 제 눈 앞에는 눈발이 날리는 너른 들판이 펼쳐졌습니다. 조심해서 심장을 싸들고 근처 시계점에 가서 내밀었더니, 주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고개만 젓더군요.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저는 왕이 통치하는 나라의 정원 담당 시녀였는데, 어느 날 왕이 하명하기를, 궁의 드넓은 정원을 다 파서 연못으로 만들고, 파낸 흙으로는 거대한 화분 하나를 만들라더군요. 수십 일의 공사 끝에 정원이 사라진 곳에 연못이 들어서자, 왕은 매일 초현실적으로 커다란 낚싯대를 연못에 드리우고 고기가 물기를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보다못해  여러 대신들이 바다로 나가 고래를 잡아다 왕의 낚시바늘에다 꿰어놓고 한숨을 내쉬는 실정이었습니다. 


저는 정원에서 파낸 흙을 특별히 주문해 구워낸 커다란 화분에다 담고  튤립 알뿌리 하나를 심었습니다. '화분의 크기에 걸맞는 아주 거대한 튤립이 피어날 거야.'라는 희망을 같이 담았죠. 하지만 꽃이 피기를 고대하던 봄에 피어난 건 정원 크기 만한 화분에 어울리지 않는 아주 작고 귀여운 붉은 튤립 한 송이었습니다. 땅에 떨어진 후의 제 심장 크기 만해서 잠시 반가웠으나 왕의 욕망에서 너무나 먼 튤립이었기에 끝내 눈문을 쏟고 말았습니다.


(암전) 


조금 전, 4 년 전 서울역 광장 두번 째 계단참에서 저와 부딪쳤던 한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자기 정원에 요즘 아주 탐스런 튤립들이 다투어 만발하고 있으니, 주말을 맞아 왕과 함께 튤립 구경을 오라는 초대전화였습니다. 대체 그는 어떻게 제 전화번호를 알아낸 것일까요...? 

그와 통화하는 동안 저는 진작에 심장을 새로 갈아 넣었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서 제가 새 심장을 구해넣을 수 있었겠습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제게 일어났던 일이니 현실일 수밖에 없는데, 서울역사 두번 째 계단참에 제 심장이 떨어졌었습니다. 4 년 전 겨울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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