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한대로 이오지마 전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진주만 공습 뒤 8개월 동안 일본은 태평양 절반을 지배하고 전세계 고무 생산량의 75%및 막대한 양의 석유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보급로와 통신로가 길어지면서 일본군 취약점을 드러내게 되고 미드웨이해전이후 패전을 하기 시작합니다. 어릴적 초딩때 주위 할아버지들에게 일제 시대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일본군 비행기용 기름을 만들기 위해 소나무 껍질을 벗기는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기가 바로 이시기가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1944년 7월 27일 ~ 28일 하와이 호놀룰루 회의에서 루스벨트 맥아더 니미츠는 필리핀 진격경로에 대해서 합의하고

( 참조 : http://djuna.cine21.com/xe/?mid=board&search_target=user_id&search_keyword=movistar&document_srl=1272310 )

 

9월 팔라우제도의 펠레류섬을 점령하게됩니다.

(참조 : http://djuna.cine21.com/xe/?mid=board&search_target=user_id&search_keyword=movistar&page=3&document_srl=1215627 )

 

맥아더와 할시제독의 부대는 레이테섬 에서 합류하게되고, 10월21일 맥아더는 필리핀 대통령과 함께 레이테 해변에 상륙하게 됩니다. 일본은 미군의 상륙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고 하고 일본은 비행기도 없는 항공모함을 미끼로 이용하는 등, 레이테 해전에서 크게 맞붙게 됩니다. (레이테만 해전 : 이부분은 작전규모가 너무 방대해, 좀더 자료 조사후 레이테만해전을 따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레이테만 전투에서 일본은 할시제독에게 일본항공모함 4척을 모두 격침 당한 후 패전 하게 됩니다. 이 해전 이후 일본의 전함력은 무력 해졌다고 할수있습니다.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편지" 에서 보면 사령관인 구리바야시 다다미찌 중장이 방어진지를 돌면서 그의 참모들이 일본함대를 들먹이는것에 대해 “일본함대? 그런것 없다~!” 모두 궤멸되었다고 말하는것을 봤을 겁니다. 바로 레이테만 전투에서 일본함대는 그 수명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육군 역시 후퇴를 하면서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는 작전으로 변경하게 되고 끝까지 결사 항전을 하게 됩니다. 일본 대본영과 일본 지도층은 미국은 엄청난 사상자를 감당 못하고 일본본토를 침공하는 대신 휴전 조건을 제시할거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 B-29기지인 사이판기지에서 유황도까지는 1,000km. 유황도(이오지마섬)에서 동경까지는 1,250km 로서 거의 1만키로의 항속거리를 가지는 B-29 슈퍼포트리스는 하루에도 수백대가 소이탄을 가지고 도쿄공습을 감행하고 있었습니다.
 

 

>> 일본 본토를 공격한 B-29가 사이판,괌 기지로 귀환도중 토요쿄, 오키나와에서 발진한 일본 제로기에게 당한후 그 중간지점 이오지마에 비상착륙하는 모습으로 이오지마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이런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 미군은 전격적으로 B-29 에스코트 임무를 맡을 P-51 무스땅(머스탱)을 전진배치하게 됩니다.
 

 

>>B-29, P-51 항속거리와 작전반경도.

 

 

>>1944년 여름부터 미 합동참모본부에서는 이오지마를 접수하는 작전을 구상하게 되고 일본 역시 집 앞마당에서 현관까지 처 들어오는 미군의 공격에 대응, 대본영은 절체절명의 이오지마 사수를 구리바야시 다다미찌 중장에게 지시하게 됩니다.

 

 

>> 구리바야시 다다미찌 중장. 다다미찌 집안은 6대까지 일본천황을 보필하는 명성있는 집안으로 구리바야시 는 1920년대 후반 미국 텍사스주에서 기병대 훈련을 받고 캐나다 일본대사관 육군무관등으로 근무하여 진주만 기습 프로젝트의 야마모또 이시로쿠 사령관 처럼 미국의 저력을 누구보다 잘알고있는 지휘관이었습니다.
 

 

>>> 구리바야시 중장의 중요 참모들
1)호리에 요시다까 소령 - 본래 이오지마 근처 보급기지 찌찌지마에서 판견참모로 있다가 이오지마에 합류
2)니시 다께이찌 중령(남작) - 1932년 LA올림픽에서 마술 금메달 리스트로 전차지휘관
3)이찌마루 도시노스께 소장 - 해군항공대및 지상부대의 통합지휘관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편지" 초반장면에 구리바야시와 니시 다께이찌가 술을 마시면서 다께이찌가 이런 말을 합니다. " 이오지마를 차라리 바다 밑에 가라앉혀 버릴수만 있다면 제일 좋을텐데요. 화약만 충분하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만.... " 바로 이오지마의 자연환경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 인데 실제 이말은 호리에 요시다까가 한 이야기 입니다. 아마도 영화 재미를 위해 다께이찌가 한말로 처리한 것 같습니다. 천해의 섬이라지만 육지 새는 볼 수도 없고 땅을 조그만 파도 유황냄새가 코를 찌르는 물도 없는 그런 섬이었습니다. 사실 전략적 이유 말고는 지킬 하등의 이유가 없는 그런 섬이었죠.

 

구리바야시 다다미찌 중장은 8개월에 걸쳐서 대대적인 섬의 요새화를 계획하게 됩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의 무대였던 오마하 비치에서 와 같은 독일군 기관총 좌 배치는 의미가 없음을 알고 지난 팔라우 제도 의 펠렐류섬 처럼 (타라와, 퀘젤린 등) 동일한 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일단 해변 상륙은 자유롭게 허용하되 있는 화력을 총 집중하여 괴멸시킨다는.... 다다미찌 중장은 자살적인 총공격을 감행할 생각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되도록 오래 견디면서 각자가 미군 10명씩을 사살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부하들에게 하달합니다. 이러한 작전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이오지마 수비대 전원이 지하로 숨지 않고서는 불가능함을 알고 대대적인 지하요새화를 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화산섬 이오지마는 땅굴파기가 부적당한 지형으로 10cm만 파도 휴화산지대라 열기가 올라와 5분 동안밖에 작업을 할 수 없고 밖에 나가 숨을 들이켜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에 한국의 징용노동자 수백 명을 동원하게 되는데 일본본토에서 땅굴전문가까지 초빙하고, 호리에 소령 에게는 각종 철근, 콘크리트 등을 수급토록 명령을 하게 됩니다.

 

 

A. 170m 수리바치 휴화산 속의 지하 방어진지 단면도 - 수리바치 산은 7층에 이르는 갱도가 종횡으로 둘러쳐 졌고 그 갱도들은 1,000여개에 이르는 방을 연결함.
B. 터널내 외부 벙커 모습 - 벙커 총포좌들은 1비행장 주변에서만 150개 정도에 이름.
C. 지하도 모습 - 한개의 지하도는 길이가 700m에 이르고 그 하나 하나에는 14개의 출입구를 만듬.
 

 

[ 1945년 2월 19일 D데이]
해상에서는 함포 사격과 함께 미 해병대 3만 사단병력이 LVT(수륙양용전차)에 분승. 상륙을 시작합니다.

 

 

>> (상)1시간반가 량의 함포사격 이후 200여대의 함재기는 섬에 네이팜탄, 로킷탄, 기관총 세레을 퍼붓고, 사이판에서 날아온B-24는 19t의 폭탄을 투하하게 됩니다.(하) F6F 핼캣 함재기가 해병4사단 바로 앞 일본군 진지를 폭탄투하 하는 장면 - 이오지마 전투가 끝날 때가지 폭탄 1,000t 이상, 로킷탄 12,000발, 네이팜 400탱크 분을 미군 폭격기들은 이오지마 에 퍼붓습니다.

 

 

>> 이오지마 상륙작전의 총사령. 홀랜드 M 스미스 해병댕 중장(오른쪽 스미스 중장 옆은 미드웨이 해전의 영웅. 스프루언스)

 

[죽음의 검은모래 해변 상륙]

 

 

>>미군 강습함대는 해병대 2개사단을 상륙시키게 됩니다.(예비포함 3개사단) 이때는 각본대로 거의 저항을 받지 않게 되는데, 그러나 수리바치산 진지(그림왼쪽 봉우리)와 북쪽의 지하 깊숙이 마련된 진지로부터 맹렬한 십자포화가 머리 위에서 작렬하게 됩니다. 전사,부상, 실종 이라는 전투실황이 보고 되는데 실종은 직격탄으로 몸통자체가 사라진 전사자를 표현할 정도로 몸통과 머리, 팔다리가 분해되어 사라지는 전사자들이 검은 해변에 나뒹굴고 바닷물을 피로 물들이게 됩니다.

 

LVT(수륙양용전차) 1파가 해안에 9시경 도착하게 되고 스미스 중장은 취사병까지 닥치는 대로 무기 들고 해변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예언을 했지만 구리바야시 중장은 우선 침입자를 상륙시켜놓고 양쪽에서 명령한 공격으로 점멸시킨다는 작전을 펴고 있었습니다. LVT 1진당 1,200명씩 3진까지 모두 해변에 부리자 일본군 박격포가 불을 내뿜기 시작합니다.

 

 

320미리 대형 박격포도 등장, 3Km 해안에 펼쳐놓은 병사들과 군수물자들은 산더미처럼 쌓여 혼란 스러움과 함께, 상륙해안의 왼쪽으로는 수리바치산 돌격부대가 수리바치산의 정산에 게양할 미국 국기를 들고 앞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하고, 상륙해안 오른쪽으로는 4해병사단이 바위굴 진지와 맞은편 언덕으로부터 치열한 포격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때 어떤 불도저 운전병은 LSM(중형양륙함)에 탑재된 불도저 시동을 켜고 해변에 널린 해병대원들의 시체에 머물 거리지 않고 눈 딱 감고 불도저로 밀고 나갔다고 합니다. 10시경 셔먼탱크 16대가 투입되고 전진하게 되는데 해병대원들은 탱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탱크 자체가 목표물이 되다 보니 괜히 옆에 있다가는 같이 아작 나기 때문입니다. 일본군 수비대는 탱크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는지 가슴에 폭약을 둘러매고 육탄 삼 용사처럼 탱크에 돌진했다고 하는데 36t이나 되는 셔먼탱크의 전진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후 5시 첫날의 전투가 어 두어지면서 수습되기 시작하는데 3만명 상륙에  566명사망, 부상자들은 빈사상태가 되어 해변가 모래땅에 구덩이를 파는데,쌀통 속에 위로부터 구멍을 내는 것과 같아 진지구축에 쩔쩔매게 됩니다. 이때 미군은 일본수비대의 야간반격을 예상했지만 구리바야시 중장은 그렇게 무모하게 부하들을 운용하는 지휘관은 아니었습니다. 해안진지에서 박격포 공격만 집중적으로 퍼부어 개인호의 미 해병대원들은 많은 피해를 입게 됩니다.

 다음날 20일 해병 5사단 28연대는 수리바치산 공격에 착수합니다. 그러나 만 이틀 반이 걸려서 이 산을 점령하게 되는데 어떤 장교는 솔직한 심정으로 " 이 성가신 부동산을 빨리 확보하고 그리고 빨리 떠나 버리자” 라고까지 합니다. 수리바치산 기슭에 마련된 주요한 해안 진지는 포격에 의해 이미 파괴되었으나 콘크리트로 만든 기관총 좌는 수백 개나 있었고 거기에 들어박힌 일본군 수비대는 기관총을 움켜쥐고 미 해병대가 접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리바치산 내부에는 다시 1,200명의 병사가 숨어 있어 종횡으로 뚫린 터널을 돌아다니며 가장 공격하기 쉬운 지점에서 수시로 얼굴을 내밀며, 접근하는 미 해병을 저격했습니다.

 

 

이러한 진지를 공략 하기 위해서는 화염방사기와 곤포폭약을 안고 동료의 엄호를 받는 대원이 기관총 좌의 허점이라고 생각하는 곳으로 기어올라 통기구멍에 다가가 폭약을 던져 넣거나 화염방사기로 지져버리는 방법뿐이 없었습니다.
 

>> 곤포폭약(미.일 공히 TNT와 비슷한 폭약을 소포처럼 뭉친 폭약

 

전날과 꼭같은 일이 되풀이 되고 함재기의 폭탄투하와 기총소사가 감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중엄호는 해병대와 너무 가까이에 떨어져 위험한 나머지 중지하게 됩니다. LVT는 종일 화염방사기용 기름과 곤포폭약, 수류탄을 계속 나르게 됩니다. 해병대는 새로운 무기를 고안하게 되는데 일본군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기름드럼통을 굴려 안에 든 휘발유를 몇 개씩 바위틈으로 흘려 불를 지르는 작전으로 나가게 됩니다.

 

2월22일 수리비치산에서는 살아남은 일본군이 저항을 계속하고 있으나 그 힘은 약화되어 갔으며 산 위에서 미 해병대에게 바위를 굴러서 깔아 죽이려는 다소 구시대 발상적인 엽기스러운 일본군도 있게됩니다.^^;

 

2월23일 해리 시미트 소장은 이오지마를 제압하는데 10일이면 충분하다는 공략 개시전의 자기 예언을 되풀이 하였지만 이섬의 완전한 제압은 25일후인 3월 16일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1/3은 미군 손에 들어왔습니다만 북쪽으로 이어진 나머지 2/3이야 말로 가장 험난한 땅이었습니다.

 

북쪽의 382고지(382ft)와 부근의 터키노브(칠면조 혹 같이 생긴) 분지에는 3층으로 된 포 좌와 포 탑까지 지하에 묻힌 몇 대의 전차가 있었습니다. 이곳 일본군들은 인간 개미무덤처럼 수비대형을 갖추고 저항을 하고, 해병대원들은 이 지역을 미트그라인더(고기 분쇄기)라는 별명을 붙이게 됩니다. 해병4사단은 이 고지와 터키노브를 향해 한걸음씩 전진하게 되는데 약간의 전진에도 엄청난 희생의 댓 가를 치르게 됩니다. 1m 전진할 때마다 평균 4명의 사상자가 나오게 되는데 해병 4사단은 이곳에서 하루에 792명의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이것은 이오지마 전투 중 최악의 숫자로 기록이 됩니다. 상륙 5일이 되면서 해안에는 야전병원 활동이 개시되면서 미국본토에서는 헌혈된 혈액이 36시간 이내에 비행기로 운송되기 시작되고, 미군 집단묘지도 순식간에 넘쳐 납니다. 주야를 불문하고 들것에 시체가 실려와 1렬 50구식 몇 줄씩이나 늘어서게 됩니다. 

 

>>라이프지를 장식한 382고지 폭파분쇄작전 모습

 

상륙9일째 모든 전선에 전황의 호전기미가 보이나 공격진도는 지지부진하고 해병 3사단 9연대는 니시남작의 8대의 전차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사실 니시남작은 전차를 기동부대로서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면서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이오지마 지형의 기복으로 실행 불가능함을 알고 전차를 포탑까지 지하에 묻든지 포탑만 떼내어 지상에 설치하든가 해야 되는데, 이마저 정지상태에서 방어에만 임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알고 모든 전차의 위장용 나무를 제거하고 돌진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미해병대는 바주카포와 화염방사기로 3대를 파괴하고 2대는 함재기에 의해 파괴 당하고 니시 전차부대는 겨우 3대만 남게 됩니다.

 

중앙섬 왼쪽에는 5해병사단 27연대가 조그마한 언덕 362A고지를 점령할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고지 맞은편 등성이로 위치확보를 위해 이동 중 반대쪽으로 부터 소총과 기관총 세례로 저지당하게 됩니다. 그 반대쪽은 경사면에 동굴과 기관총 좌가 곳곳에 만들어져 있었으며 한 개의 동굴 앞으로 100m 전진하는데 미군은 1시간 남짓한 시간이 걸리면서 94명의 전사자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 동굴에 애를 먹은 이유는 일본수비대는 동굴입구를 탐색하던 해병대원의 눈 앞에 한 일본군 병사가 모습을 나타내어 똑똑히 보이는 곳에 주저 앉았습니다. 일본말을 할줄 아는 매크린이라는 중위가 이 병사를 항복시키려고 설득을 시작하는데 18m까지 접근한 매크린 중위는 식량, 물, 의약품을 준다고 약속을 했으나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그 일본군은 계속 말을 않고 있다가 30분후 매크린 중위가 화를 내면서 “ 왜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가? “ 하고 외쳤는데 그때 다른 해병대원이 일본군의 몸으로부터 동굴까지 와이어가 뻗쳐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유인을 위한 미끼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 일본군이 공격자세로 몸을 일으킨 순간 해병대의 집중사격이 퍼부어져  벌집이 되고 맙니다. 3월4일 382고지는 점령되고 터키노브도 제압됩니다. 382고지를 제압함으로서 미군은 일본군이 차지하고 있는 이오지마 북부에 대한 관측지점을 얻게 되고 일본군 수비대는 적의 배후를 관찰하기에 좋은 중요한 지점을 잃게 됩니다.

 

상륙일 17일째인 3월8일 해병5사단은 이오지마 북쪽 해안을 향해 전진하게 됩니다. 목표는 이오지마 최북단 기따노하나~! 전진도중 바위 틈마다 일본군이 숨어 있어 미군은 저지당하게 됩니다. 이때 소총소대의 텍사스주 베일러대학 미식축구 선수인 잭 러머스 중위는 전속력으로 달려 전진하게 되는데, 일본군의 수류탄으로 부상을 당했으나 다시 일어나 계속 달립니다. 곧장 돌진하여 적의 포 좌를 파괴하고 다시 일본군 수류탄에 쓰러져 어깨에 구멍이 뚫리게 됩니다. 그는 다시 또 일어나 적진에 돌입 일본군을 수류탄으로 제압합니다. 계속 달려 나가며 부하들에게는 뒤를 따르라고 외치는데 그순간 한쪽 발이 지뢰의 밞게 되는데,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그는 구덩이 속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고 지뢰 때문에 두 다리가 모두 떨어져 나간 것 알게 됩니다. 그래도 그는 부하를 향해 계속 전진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죠. 그날 오후 그는 한쪽 팔꿈치로 의사에게 지탱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 저 선생님 뉴욕 자이언트는 최고의 선수를 잃은 것 같군요 “ 그날 저녁 그는 숨을 거둡니다. 그 무렵 러머스 부하들은 이오지마 북 해안의 마지막 등성이에 도달하여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일본군의 저 지망을 필사적으로 돌파하고 마침내 끝 해안까지 도달했던 것입니다. 미 해병대 전 사록에는 이렇게 적혀있다고 합니다. “ 소대장에 대한 존경과 동정, 그리고 그 죽음을 안 뒤의 분노와 실망이 뒤섞여 그들의 마음에 불이 붙었던 것이다. “ 일본군의 장기인 육탄공격의 미국판?

 

>> 이오지마 공략 상황도(그림 상단 키타노 포인트는 구리바야시 중장의 최후의 방어선임)

 

기따노하나 3km 떨어진 해안에서는 일본군의 총공격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지휘자는 일본해군 지상부대의 지휘관 이노우에 대령. 그는 1,000명의 부하와 함께 미해병4사단 23,24연대에 포위되어 포위망이 좁혀지고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적에게 포위된채 죽는다는 것은 무사가문의 출신으로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질없는 공격을 금한다는 구리바야시 중장의 작전명령에 거역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마지막 선택으로 그는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합니다. 미군상륙 17일째 그는 미군 포위망을 뚫고 나가 수리비치산에 다시 일장기를 휘날리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한밤중 전 부하를 거느리고 미해병 23,24연대가 있는지역으로 향하게 됩니다. 일본군은 소총, 수류탄을 들고 폭약을 가슴에 두르고, 개중에는 죽창만 들고 있는 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소리없이 숨을 죽이고 미해병대 지휘소 앞 10m까지 간 후 돌격! 을 외치면서 백병전을 치루게 됩니다. 주위에는 화염과 조명탄이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돌격대는 미군으로부터 박격포와 기관총, 소총, 수류탄의 반격을 일제히 받습니다. 이때 미군 한 중대에서만 수류탄 20상자가 사용되고 당시 이노우에 대령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돌격 앞으로 외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게 됩니다. 날이 밝고 미군이 헤아린 일본군의 시체는 784구 미군의 피해는 사망 90명, 부상 257명이었습니다.

상륙 18일째 3월9일 이오지마 공격군 미해병3사단은 섬 북쪽 해안에 도달하게 됩니다. 절벽 사이사이의 벙커 기관총 좌는 벌써 미 해군 함포사격으로 그 잔해를 드러내놓고, 한 대원은 바닷물을 물통에 담아  사단장 그레이브스 어스킨소장에게 보내집니다. 물통에는 “검증용 음료수가 아님” 딱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3사단 A중대병력은 처음 상륙 시 200명에서 잔존병력은 3명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이오지마 최북단 기따노하나 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저항하게 됩니다. 이 장소는 박격포는 쓸모가 없고 전차 역시 움직이지 못하는 지형이라 미군은 기따노하나 의 모든 동굴은 기관총 좌 하나 하나 이 잡듯이 불태워버립니다. 이 작전 중에 화염방사기용 기름이 매일 3만8,000리터씩 소비가 됩니다.


상륙 22일째 3월 13일 미해병 3사단 26연대 정찰대는 구리바야시 중장의 턱밑까지 육박하게되고  3월14일 시미트 해병소장은 실직적으로는 이 싸움에 이겼다고 생각하고 수리바치산에서 수백m 떨어지 북쪽 지점에서 승리의 식전을 베풀게 됩니다. 일본군 엄폐호의 잔해 위에 세운 24m의 막대기 위에 성조기가 올라가고 대령 한사람이 니미츠 제독의 선언문을 읽습니다. “ 나의 지휘하에 있는 미국 군은 이오지마를 비롯한 화산열도를 제압했다. 이들 제압된 섬들에 있어서의 일본제국 정부의 권력은 모두 정지 되었다.”

3월 17일 괌 에서 니미츠 제독은 공식성명을 발표합니다. 이날까지 이오지마 에서 미군 사상자 수는 전사자 4,189명 부상자 1만 9,938명 미국 해병대 창설 이래 168년의 역사에서 그 어느 전투에서 보다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이후 이오지마 희생자는 이때의 발표수보다 더 늘어나게 되는데, 부상자중에 많은 사망자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최종 통계는 전사,행방불명, 전상사망자 6,821명. 부상자수 2만 1,865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같은 날 어스킨 소장은 두사람의 일본군 포로에게 편지를 주어 구리바야시 의 사령부로 보내게 됩니다. 편지에는 구리바야시가 놓인 상황은 이제 절망적이며 항복을 하면 명예로운 대우를 받게 될 것이라고 적혀있었지만 회답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후 구리바야시는 최후의 결사대 공격을 하게되고 3월26일 싸움에서 일본군 262명 미군 53명이 전사하게 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구리바야시 중장은 중상을 입고 나중에 자결을 했다고 합니다. 그 유해는 부하에 의해 깊이 매장되었다고 하는데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구리바야시를 비롯한 일본군은 마지막 힘을 다하여 실속없는 공격을 감행했으나 이오지마의 전투는 실질적으로 그 전날 상륙일로부터 34일째인 3월25일에 종결되어 집니다.

 


>> 아래는 퍼시픽9부 라스트 장면입니다. 오끼나와 전투에서 악전고투한 주인공 유진이 소대장으로 부터 핵폭탄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는 장면입니다. 상념에 잠기는 유진 뒤로 오끼나와 앞바다 미함대 위를 은빛 B-29 편대가 일본 본토공격을 위해 지나가는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피의 이오지마를 공략하는 의미가 실현되는 순간입니다. 

 

 

다음은 오끼나와 전투가 남았습니다. 많은 성원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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