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얼굴

2016.03.08 15:08

Bigcat 조회 수: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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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롬웰의 병사들에게 모욕당하는 찰스 1세, 폴 들라로슈, 1837년, 부분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역사나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곧잘 궁금해하는 주제들 중의 하나가 바로 프랑스의 공화정과 영국의 입헌군주에 대한 것입니다. 왜 바다 건너 영국은 큰 혁명이나 별다른 소요없이 순조롭게 근대 민주주의의 길을 걸어왔는데, 그 바로 이웃한 프랑스는 대혁명을 비롯한 7월 혁명, 2월 혁명...파리코뮌까지 별별 혁명과 소요사태를 겪으며 (레미제라블의 주 소재가 되는 바리케이트 시위까지 더하면 정말 엄청나죠...) 극도로 험난한 길을 걸어왔냐는 겁니다. 우리에겐 바다 건너 수 백년전의 일이니 그냥 역사적으로 재밌는 얘깃거리에 불과합니다만, 정작 당사자들에겐 꽤나 중요한 화두였을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질문은 프랑스인들 스스로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왔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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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0년대와 1830년대 프랑스 문화계에서는 좀 특이한 유행 하나가 일고 있었습니다. 바로 '영국열풍' 이었죠. (미술평론가 이주헌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이건 마치 일본이나 중국에 부는 '한류'같은 것이었다는군요ㅋ) 이게 왜 특이하냐면, 2천년 영불관계를 통틀어 아마 유일무이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언제나 유럽의 '본류'였죠. 특히 영국에 관해서라면 언제나 그랬습니다. 그 어떤 문화사조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흘러갔지, 그 이웃한 섬나라에서 프랑스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프랑스에 '영국열풍'이 불고 있었던 겁니다! 그럼 갑자기 프랑스 부르주아들이 영어를 막 배우고 끼니 때마다 영국 요리를 먹고...물론 그건 아니고요! 이 프랑스의 영류 바람은 한 가지 좀 특이한 면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영국사' 이웃한 섬나라의 역사에 열광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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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경향은 특히 예술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당시 지배적인 미술사조였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 이 둘을 절충한 절충주의 유파의 선두주자였던 폴 들라로슈도 이 '영국열풍'을 주도하는 화가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절충주의란 신고전주의식 화면 구성에 낭만주의식 인물묘사를 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 조각같은 인물상에 슬픔이나 고통같은 인간의 감정을 깊고 드라마틱하게 묘사하는 것이죠. 낭만적으로요)


 19세기까지 유럽 미술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했던 장르 '역사화'에서 단연 대가의 위치에 있던 들라로슈는 자신의 역사화의 주 소재로 '영국사'의 주요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반면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전통 회화에서 최고의 장르는 단연 '산수화'지만 말입니다.) 폴 들라로슈는 임종을 맞는 엘리자베스 1세의 모습같은 평이한 소재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그가 특히 특히 집중했던 소재는 레이디 제인 그레이나 찰스 1세 아니면 에드워드 5세같은 영국사의 비운의 군주들이었습니다. 9일 동안 왕위에 있었던 제인 그레이가 눈가리개를 한 채 단두대 앞에 무릎꿇고 있는 그림이나 대체 앞으로 어찌될지 모른채 떨고 있는 두 어린 형제의 - 소년왕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 요크 공작 리처드 -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정말 애통하게 하죠. 

 그리고 이 그림 <크롬웰의 병사들에게 모욕당하는 찰스 1세>만큼 관람자의 맘 한 구석을 심난하게 하는 그림도 드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왕의 권한은 신이 내렸다는 '왕권신수설'을 추종했던 그는 이제 모든 걸 잃고 혁명군을 자처하는 역도들 손아귀에 있습니다. 그는 임금이었지만 그들에게 재판을 받았고 그 역도들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무려 '반역죄'로요! 그는 나라의 최고 주권자인 하늘이 내린 자 - 중국식으로는 천자 - 인데, 오히려 반역자가 되어 이제는 모든 것을 잃고 죽음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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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되면 이런 그림을 그린 폴 들라로슈나 이런 류의 영국사 그림에 열광한 당대 프랑스의 부르주아들이 어떤 심리 상태에 놓여있었는지 짐작이 될 것입니다. 지난 1815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이후 프랑스는 빠르게 왕정복고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들이 차례로 돌아와 왕이 되었고 마치 지난 시절의 대혁명에서 얻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프랑스의 모든 것이 혁명이전의 구체제로 돌아선듯 했습니다. 물론 이에 반발하는 공화파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그들이 일으킨 7월혁명(1830년)의 결과로 얻은 건 공화정이 아닌 입헌군주제였죠. 부르봉 왕가의 전제정 대신에 부르봉 가의 외손 루이 필리프가 '시민의 왕'이라고 스스로 일컬으며 7월 왕정을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전제군주가 아닌 '입헌군주'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웃 나라 영국에서 하고 있는 '입헌군주제'를 따른다는 것이었죠. 이런 정치적 분위기가 미술계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바로 이와 같이 영국사에 열광하는 '영국풍'을 낳았던 겁니다. 비극적으로 죽은 영국왕들 추모하면서요. (들라로슈는 레이디 제인 그레이나 찰스 1세를 그리면서 대체 누굴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16세?) 들라로슈는 루이 필리프 치하 약 20년간 진행됐던 프랑스의 입헌 군주제를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이는 2월 혁명으로 7월 왕정이 붕괴되고 프랑스에 다시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죠. 그는 1851년에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다시 그리면서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 했습니다. (마침 이 해는 나폴레옹 3세의 제정이 다시 시작된 해이기도 했습니다. 들라로슈의 심정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는 부르봉 왕정을 추모하긴 했지만 그런만큼 나폴레옹의 제정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거든요.) 화면속에서 재판정에 들어서는 왕비는 지쳤지만 당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운명에 맞서고 있습니다. 들라로슈는 재판을 구경하러 몰려든 왕비 주변의 백성들 얼굴을 마치 악귀처럼 그리면서 공화파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단적으로 드러냈죠.


 다시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그런데 말입니다. 이미 다 지난 일이긴 합니다만 대체 왜 영국에서는 입헌군주정이, 반면 프랑스에서는 공화정이 수립되어 오늘에 이른 걸까요? 들라로슈를 비롯한 부르주아들 중에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한 세력들도 꽤 있었는데 말입니다. 여기엔 재밌는....-_-;; 대답이 있더군요. 이게 다 영국의 식민지 개척 때문이라는 겁니다. 19세기에 '해가 지지않는 나라'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영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엄청난 식민지가 있었죠. 바로 그 식민지 경영하러 국내의 부르주아들이 모두 해외취업하여 나가버렸기 때문이랍니다....그런 반면 프랑스는 대외에 식민지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취업이 안된 부르주아들이 국내에서 계속 혁명과 시위를 벌였다고요...근대 시민혁명가들 대부분이 부르주아들이었으니 뭐 틀린 얘기는 아닌것 같은데, 참 씁쓸한 대답이더군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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