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란건 잔인하다

2016.03.21 09:50

칼리토 조회 수:1390

집에서 구피를 키우고 있습니다. 키운다기도 뭐한게 아버지가 관리하시는 어항에 구피가 들어있는거죠. 저는 그냥 구경만 합니다. 어항이 있으면 좋은게 전체적인 집안의 습도 조절도 되는 것 같고 볼거리가 있으니 좋아요. 


구피가 어느순간 개체수도 줄어들고 처음에 화려했던 색도 약해진 것 같아 아무 생각없이 마트에서 막구피를 네마리 사다 넣었어요. 짝맞춘다고 암수 두마리씩 말이죠.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저희집 어항은 아닙니다만.. 이런 식의 싸움이 벌어졌나 봐요. 수컷들끼리 서열 경쟁을 한거죠. 거기에 다른 암컷도 휘말린 모양.. 새로 들여온 네마리만 살아남고 기존의 성어들은 거의 다 죽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일주일 지나니 어항에는 새로 들인 네마리와 치어들만 남아있더군요. 


어항속에서 나름 평화롭게 살아가던 원래의 구피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진 느낌일겁니다. 자신과 새끼들을 위협하는 적대세력이 이렇게 갑자기 쳐들어오다니 말이죠. 그리고 몰살의 과정은 인간들이 지켜보지 않는 틈에 벌어진 일이라 짐작만 할 뿐.. 어느샌가 줄어가는 개체수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습니다. 지나고나니 어항속 풍경이 달라진 것만 인지한 것이죠. 


어쩌면 신의 입장에서 인간들이 이런 구피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일시적인 변덕, 혹은 너무 밋밋해져 버리고 약해져 버린 개체에 대한 개량의지(?)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적대적인 개체들이 등장하고 착하게만 살아온 존재들은 어느순간 사라집니다. 너무 잔인한 비유일까요??


사실 이 모든 사건의 당사자인 제가 느끼는 건 죄책감입니다. 그냥 살던대로 내버려뒀으면 평화롭게 살 아이들에게 저는 마치 신처럼 고통을 내려버린 거죠. 그것도 제대로 알지도 못한채로 말입니다. 이제와 후회를 해봐야 죽어버린 구피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구피라는 녀석들이.. 좀 잔인한게 자기네들이 낳은 새끼도 먹어치우는 녀석들이라 말이죠. 치어들이 좀 보인다 싶어도 어느샌가 줄어 있기도 해요. 


지금의 어항은 매우 활기찹니다. 싸움에서 이긴 놈들이 독차지하고 있으니까요. 역시나 살아남은 치어들도 나름 생명력이 있는 녀석들일테니 조만간 개체수가 늘겠죠. 어항을 활발히 누비는 새로운 세대를 보며.. 이런 저런 상념에 잠깁니다. 모르면 가만히나 있을걸.. 어쩌면 우리를 만들어낸 신도 그런 생각을 지금쯤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알파고를 만들어낸 인류도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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