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20 13:19
어릴 때는 여행에 대한 꿈을 많이 꿨어요.
특히 혼자 오지로 가고, 노숙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요.
이런 꿈에 대해 이야기하면 두 번 중 한 번은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야 여자앤데..."
그때부터 억울하고 답답했어요. 내가 여자라서 뭐? 여자면 왜 기차역에서 자면 안돼? 여자면 왜 낯선 집에서 자면 안돼?
그게 왜 멍청한 거야? 남자는 왜 되는데?
"위험하니까..." 라는 대답이 답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에 악의가 돌아다닌다고, 왜 내가 내 자유를 쫒지 못하는지.
왜 그게 '현명한' 행동이 아닌지.
실제로 여행해 보니까, 사실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습니다.
여행지로 알려지지 않은 동유럽 시골에서 실제로 낯선 남자의 집에서 자야하는 일이 생겼었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가슴이 쿵쾅거려서 잠이 안왔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정말로 한밤중에 제 방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눈을 질끈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어요. 숨이 막혔죠.
목울대를 쳐야 하나, 눈을 찌를까. 낭심을 잡을 수 있을까. 일단 나부터 때릴지도 모르니까 이를 악물자.
그리고 그 남자는 저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다시 나갔습니다.
빛이 들자마자 집밖으로 뛰쳐나갔어요.
이제 숙소를 예약할 수 없는 지역에는 절대 여행가지 않아요.
세계지도가 좁아진 셈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전 찜질방에 가는 것도 싫어합니다. 성추행 당한 이후로 아무리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가도 그 공간에서 휴식할 수 없어요.
집을 구할 때 반지하, 1층, 유흥가, 골목은 모두 제외되죠. 당연히 비용은 올라갑니다.
야근을 해도 대중교통 끊길 시간은 피합니다. 택시 타기 싫으니까요. 집에 가서 합니다.
집에 가는 시간이 늦어지면 인적이 드문데 양 옆으로 작은 골목이 많아요. 그래서 그 부분부터는 뛰어갑니다.
몰카가 화제 되면서부터는 공중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촉이 곤두섭니다.
특히 젊은 여성이 많이 다닐 만한 지역에서라면 그래요.
쓰레기통에 많이 숨긴다고 해서 그 위로 휴지를 한 겹 덮고, 변기 위를 확인하고, 변좌를 들어보고, 타일 틈새를 휴지를 말아 막습니다.
그런데 카메라를 두려워할 일이 아니게 됐어요.
대안이 뭘까요? 남자들이 화장실에 갈때마다 데려다주는 것? 집에 갈때마다 가족이 데리러 나오는 것?
그걸 '배려'라고 느낄 지 모르겠지만 '제한'입니다.
내 영역과 반경의 제한이고 축소입니다.
생존을 불안해 하면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게 그냥 약자의 현실이다, 라고 수긍하고 싶지 않습니다.
약육강식이 인간의 본능이고 본능에 따라 살아야 하는 거라면
법은 왜 있고 제도는 왜 있나요?
폭력이 왜 불법인가요?
본능이 있는 그대로 활개치는 세상이 여자 뿐 아니라 남자에게도 좋은 세상일까요?
이런 두려움은 내 물리적인 영역 뿐 아니라 사고와 행동을 잠식합니다.
낯선 남자가 도움을 요청하면, 휴대폰을 빌려주는 것처럼 간단한 일도 응하기 전에 고민합니다.
가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최대한 차갑고 냉정한 표정을 합니다.
웃기지만 경험상 시선을 받거나 시비가 걸리는 확률이 줄어들어요.
나는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옹졸하고 불쾌하게 굽니다. 그 편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니까요.
스스로 생각합니다. 마치 최대한 시끄럽게 짖는 치와와같다고.
'조심하고' 산다는 게, 세상을 얼마나 좁히는지, 얼마나 나를 제한하고 작은 인간으로 만드는지,
술먹고 길거리에서 쓰러져 자도 제일 걱정되는 게 지갑 털리고 입돌아가는 일인 사람들은 알 수가 없어요.
전 의식이 세상을 많이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첫걸음은 현실인식이고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세상은 달라요.
이 말이 남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고 왜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2016.05.20 13:45
2016.05.20 13:54
하...이런 글 읽을 때마다 막막해져요.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거란 정말이지 고통스러울 것 같습니다...
2016.05.20 13:58
변하지 않는 사회는 죽음의 해골과 같으니 희망을 봅니다.
2016.05.20 18:57
2016.05.20 20:51
예전에 네오나치가 날뛰는 나라에서 체류한 적이 있어요. 다른 때에도 위험은 있었지만 히틀러 생일을 전후로 거진 한달이 외국인들에게 비상이 걸리는 시기였는데요. 저 멀리 빠박머리만 봐도 흠칫하고 행동반경과 시간이 제한되고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고, 무엇보다 배려라고 하는 현지인들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부질없는 지 겪고나니까, 매일매일이 생존이라는 여성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가닥이 잡히더라구요. 물론 저의 짧고 제한적인 경험과는 비교도 되지않을 거란 점 알아요. 한동안 트위터에서 이어졌던 여성들의 택시 경험기를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요. 그동안 '왠 미친놈이 시비걸어서 속상했지? 그냥 재수없었던 거니까 의미 두지말고, 잊어버려' 하며 지나갔던 주위 여성들의 자잘한 일화들이 떠오르면서, 아 그게 "재수없어서가"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들었어요. 말씀대로 남성들의 현실인식과 공감이 가장 필요한 시기라고 봐요. 꾸준히 헛소리 하는 부류도 많지만 굳은 머리 깨려고 좌충우돌하는 사람도 많을테니 힘을 내셨으면 합니다.
2016.05.21 03:18
2016.05.21 03:22
공중화장실에서 몰카 신경쓰시는 거 보통 스트레스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안기는 몰카가 이끼처럼 자연 생성되는 게 아니고 남자들이 설치한다는 것에서... 솔직히 참 죄송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