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잡담

2010.03.05 10:02

DJUNA 조회 수:1951

1. 중계

올해 OCN의 아카데미 상 중계는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습니다. 작년과는 달리 진행자들은 쓸데없이 알지도 못하는 것에 떠들어대지 않았고 형편없는 실수도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수년 간의 혹독한 고문을 통해 제 기대치가 낮아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동시 통역은 거슬렸고 (특히 계속 격앙된 목소리로 수상자의 목소리를 덮어버리는 첫번째 동시 통역은 불편했습니다.) 진행자들의 쓸데없는 농담 따먹기는 심심했습니다. 종종 나오는 실수들도 하루 전에 조금만 인터넷 서핑을 했어도 막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니콜 키드먼이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게 유언비어라는 건 며칠 전에 벌써 대변인을 통해 공식 확인되었던 것이죠. 한마디로 다들 숙제를 안했단 말입니다.

올해 중계의 가장 큰 실수는 '인 메모리엄'과 75주년 기념으로 아카데미 수상자들을 모아놓는 행사를 중간에 잘라버린 것입니다. 일단 인 메모리엄은 매년마다 있는 중요한 행사인데 그걸 그냥 무시해버렸으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죠. 두번째 행사를 잘라낸 것도 마찬가지로 심각했습니다. 특히 행사 마지막에 올해 수상한 네 명의 배우들이 모두 나오는 장면이 있었으니 더욱 그랬죠. 이걸 보지 못한 사람들은 왜 남녀주연상을 그렇게 빨리 발표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2. 수상 결과

이미 다들 아시겠지만 그래도 참고하실 분들을 위해 수상작 리스트를 여기 올려놓습니다. 공로상을 제외하면 알파벳 순서입니다.

ACTOR IN A LEADING ROLE 
Adrien Brody 
THE PIANIST 

ACTOR IN A SUPPORTING ROLE
Chris Cooper 
ADAPTATION 

ACTRESS IN A LEADING ROLE
Nicole Kidman 
THE HOURS 

ACTRESS IN A SUPPORTING ROLE
Catherine Zeta-Jones 
CHICAGO 

ANIMATED FEATURE FILM
SPIRITED AWAY 
Hayao Miyazaki 

ART DIRECTION
CHICAGO 
John Myhre (Art Direction); Gordon Sim (Set Decoration) 

CINEMATOGRAPHY
ROAD TO PERDITION 
Conrad L. Hall 

COSTUME DESIGN
CHICAGO 
Colleen Atwood 

DIRECTING
THE PIANIST 
Roman Polanski 

DOCUMENTARY FEATURE
BOWLING FOR COLUMBINE 
Michael Moore and Michael Donovan 

DOCUMENTARY SHORT SUBJECT
TWIN TOWERS 
Bill Guttentag and Robert David Port 

FILM EDITING
CHICAGO 
Martin Walsh 

FOREIGN LANGUAGE FILM
NOWHERE IN AFRICA 
Germany
Directed by Caroline Link 

MAKEUP
FRIDA 
John Jackson and Beatrice De Alba 

MUSIC (SCORE)
FRIDA 
Elliot Goldenthal 

MUSIC (SONG)
8 MILE 
'Lose Yourself'
Music by Eminem, Jeff Bass and Luis Resto; Lyric by Eminem 

BEST PICTURE
CHICAGO 
Martin Richards 

SHORT FILM (ANIMATED)
THE CHUBBCHUBBS! 
Eric Armstrong 

SHORT FILM (LIVE ACTION)
THIS CHARMING MAN (DER ER EN YNDIG MAND) 
Martin Strange-Hansen and Mie Andreasen 

SOUND
CHICAGO 
Michael Minkler, Dominick Tavella and David Lee 

SOUND EDITING
THE LORD OF THE RINGS: THE TWO TOWERS 
Ethan Van der Ryn and Michael Hopkins 

VISUAL EFFECTS
THE LORD OF THE RINGS: THE TWO TOWERS 
Jim Rygiel, Joe Letteri, Randall William Cook and Alex Funke 

WRITING (ADAPTED SCREENPLAY)
THE PIANIST 
Screenplay by Ronald Harwood 

WRITING (ORIGINAL SCREENPLAY)
TALK TO HER 
Written by Pedro Almodóvar 

HONORARY AWARD 
Peter O'Toole 

올해 아카데미상 수상자 리스트에는 유력 후보에게 몰아주기와 깜짝 수상이 적당히 뒤섞여 있습니다. 일단 [시카고]가 작품상을 받은 건 모두가 예상한 결과였습니다. 이 영화가 최다 수상작이 될 것이라는 것 역시 모두가 예상했었고요. 이 작품이 감독상을 받지 못할 거라는 것 역시 어느 정도 확실했습니다. 캐서린 지타-존스의 여우조연상 수상은 그보다 덜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예상 못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많은 다른 수상자들 역시 예측대로였습니다. [디 아워스]의 니콜 키드먼, [어댑테이션]의 크리스 쿠퍼는 골든 글로브 이후 거의 정해진 수상자였죠. [두 개의 탑]이 특수 효과 부분에서 선전한 것도 마찬가지였고요. [갱스 오브 뉴욕]의 참패도 [시카고]의 몰이 기세를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뜻밖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색상 같은 알짜배기 상들만 쏙 빼간 [피아니스트]의 선전은 놀라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시간이 조금 더 많다면 이 영화의 선전과 이라크 전쟁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심사숙고할 수도 있겠지만 전 안하렵니다.

분장상과 작곡상을 거두어간 [프리다]도 생각외로 선전한 작품입니다. 비영어권 영화인 [그녀에게]가 각본상을 가져간 것도 조금 놀랍다면 놀랍다고 해야겠지요.

3. 시상식

올해 시상식의 가장 큰 이슈는 전쟁이었습니다. 하필이면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어야 할 때 이라크 전쟁이 터졌으니, 결코 연례 자축 파티라고 할 아카데미 시상식을 열 분위기는 아니었죠. 예정일 전날까지만 해도 시상식이 취소되고 수많은 중요 게스트들이 참석하지 않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ABC에서 전체 생방송 중계를 하지 않을 거라는 말도 있었고요.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시상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레드 카펫 행사가 대폭 축소되었고 비교적 담담한 분위기였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와 카롤리네 링크와 같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진행에 방해가 될 정도로 중요한 인사가 전쟁 때문에 빠진 경우는 없었습니다. (시상식 이전에 사망한 콘라드 L. 홀이나 미국에 방문 자체를 할 수 없는 폴란스키는 전쟁이 아니어도 어쩔 수 없었고요.)

그러나 전쟁은 여러가지로 시상식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피터 잭슨이나 안젤리나 졸리, 윌 스미스,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같은 게스트들은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위원회가 프레젠터들의 언행을 엄격하게 통제했지만, 수잔 서랜든이나 더스틴 호프먼, 메릴 스트립과 같은 사람들은 '평화'를 뜻하는 V자 제스처나 반전 메시지를 담은 비둘기 핀과 같은 것들을 이용해 소극적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프리다]의 주제곡을 소개하기 위해 나온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과 같은 프레젠터는 규정을 무시하고 조금 더 나갔고요.

위원회가 원천봉쇄할 수 없었던 건 수상자들이었는데, 비교적 엄격하게 수상 소감 시간을 제한하려고 했던 시도에도 불구하고 애드리언 브로디, 니콜 키드먼, 크리스 쿠퍼,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같은 수상자들은 모두 다양한 강도와 각도에서 전쟁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물론 그 중 가장 화제를 모은 사람은 [볼링 포 콜럼바인]으로 장편 다큐멘터리 상을 받은 마이클 무어였습니다. 같은 부분 후보자들을 모두 무대로 끌고 올라와 강도높은 전쟁 비판 연설을 했던 그는 기립박수와 야유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돌이켜보면, 기존 일정을 고집한 건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 때문에 시상식을 연기하는 것보다는 일단 부딪히는 게 나았어요. 그 결과가 '위협받는 미국의 가치'를 선전하는 것이건, 마이클 무어와 같은 사람들에게 연설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건 간에요.

4. 기타 등등

스티브 마틴의 진행은 좋았습니다. 위태롭기 짝이 없는 타이밍을 생각하면 점수를 더 줄만 했어요. 그는 파티 분위기를 충분히 내면서도 경망스럽다는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적절하게 자숙할 줄 아는 적절한 균형 감각을 선사했습니다. 종종 그가 삽입한 즉흥적인 농담들도 시상식의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상식은 빠르고 압축된 느낌을 주었습니다. 덕택에 덜 지루하기도 했어요. 시상식 자체의 서스펜스 말고도 가끔 올라오는 유명인사가 어떤 말을 할까 기대하는 재미도 있었고요. 하지만 어느 때보다 엄격해진 수상 소감 제한은 필요 이상으로 뻑뻑하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보다 전통적인 아카데미표 재미도 있었습니다. 억지로 울음을 참으려던 니콜 키드먼, 할리 베리에게 기습 키스를 한 애드리언 브로디, 작품상을 함께 발표한 더글러스 부자, 만삭의 몸으로 주제가 후보곡을 부르고 상까지 받은 캐서린 지타 존스... 물론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나 미키 루니와 같은 할리우드 고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반가웠고요. (0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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