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연애와 고정관념

2010.03.05 10:03

DJUNA 조회 수:2710

얼마 전에 [씨네21]에서 [파 프롬 헤븐]에 대한 영화 읽기 글을 읽었습니다. 제목이 [음, 그래도 흑백간 섹스는 안 하는군]이군요. 한 번 제목과 관련된 부분을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왜 두 남녀는 결혼까지 생각하는 관계인데도 키스신 한번 나오지 않는가. 언어로 흑백의 사랑을 말하고 영상으로 금하면 궁극적으로 어떤 메시지가 나올까?

할리우드는 답을 알고 있다. 할리우드의 관습은 흑백의 정사장면을 금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의 정사장면을 금한다. 백인의 집단권력에 대한 흑인의 침공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는 상대적으로 관대하다. [몬스터 볼]에서의 할리 베리처럼 흑인 여성의 육체는 성적 대상으로 전시될 수 있다...

어쩌구저쩌구... 왜 이걸 인용하냐고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처음부터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글에 실린 기본적인 정치적 해석은 한동안 정말 통했습니다. 시드니 프와티에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나 [A Patch of Blue]에서 백인 여자들과 연애를 할 때, 그건 분명 그런 선입견과 맞서 싸우기 위한 정치적 도전이었습니다. 이런 편견은 프와티에가 할리우드 스타가 된 뒤에도 꽤 오래갔습니다. 아마 [펠리칸 브리프]가 나왔던 93년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면 통했을 겁니다. [키스 더 걸]이 나왔던 97년에도 통한다면 통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먹히지 않습니다. 90년대를 넘기는 동안 할리우드가 많이 변했던 거죠.

영화를 볼까요? 젊은 스타 줄리아 스타일즈는 두 편의 인종간 러브스토리에 출연했습니다([세이브 더 라스트 댄스]와 [O].) 덴젤 워싱턴은 [He Got Game]에서 [펠리칸 브리프]에서와는 달리 밀라 요보비치와 키스 신이 있었습니다. 웨슬리 스나입스는 인종간 로맨스의 단골입니다. 그는 90년대초부터 밍나, 나스타샤 킨스키, 이렌느 자콥, 아나벨라 시오라와 커플이었습니다. [미션 임파서블 2]에서 톰 크루즈의 상대는 탠디 뉴튼이었고 [스트레인지 데이즈]에서 레이프 파인즈의 상대는 안젤라 바셋이었습니다.

텔레비전 시리즈는 어떨까요? 영화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ER]에서 흑인 의사인 피터 벤튼은 영국인 백인 의사인 엘리자베스 코데이와 한동안 애인 사이였습니다. 같은 시리즈에서 ER의 두목인 케리 위버의 여자 친구는 히스페닉계 흑인 소방수인 샌디 로페스이고, 중국계 의사인 징메이 첸의 남자 친구는 흑인 인턴인 그렉 프랫입니다. 백인 위주였던 [버피]에서도 7시즌 말엔 흑인인 로빈 우드 교장과 백인인 페이스의 베드신이 있었고요. 자매 시리즈인 [앤젤]에서 흑인 남성인 건과 백인 여성인 프레드는 커플입니다. [식스 핏 언더]에서 주인공 중 한 명인 데이빗 피셔의 옛 남자 친구 키스도 흑인입니다. [앨리 맥빌]에서 백인 여자 변호사인 앨리가 흑인 남자 의사인 그렉 버터스와 애인 사이였지요. 요새는 타인종간 커플이 없으면 오히려 서운할 지경입니다. [프렌즈]에서 흑인 과학자 찰리가 등장한 것도 그런 유행을 따르기 위해서였겠죠.

자, 이 정도만 해도 위의 주장은 아주 허약하게 무너집니다. 하나.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나 영화에서 흑백 커플은 상당히 많이 존재합니다. 둘.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의 커플보다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의 커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고요? 그건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아뇨. 전 지금 인종차별과 편견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두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첫째. 최근 10여년 동안 주류 흑인 스타들이 굉장히 늘어났습니다. 많은 영화들에서 흑백간의 커플은 인종적 의미가 없는 순수한 스타 맺어주기였습니다. [펠리칸 브리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주저했지만 계속 이런 식의 영화들이 반복되면 사람들도 인종간의 연애 자체에 덜 신경을 쓰고 고유의 개성에 더 집중하기 마련입니다.

둘째. 타인종간의 연애가 쿨한 트렌드가 될 정도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최근 몇몇 조사에 따르면 인종간의 로맨스를 당연하다고 여기는 걸 넘어서 근사하다고 느끼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실생활에서 타인종간의 연애는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인종 편견은 오히려 둘 사이의 관계를 더 멋지고 근사하게 만들어주는 배경 역할을 하지요.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관계가 더 많은 것도 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게 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더 쿨하기 때문이죠. 물론 흑인 남성 스타들이 흑인 여성 스타들보다 더 많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인종간의 로맨스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조금씩 변화했습니다. [ER]에서 엘리자베스 코데이에게 피터 벤튼과의 관계는 상당한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시청자들은 코데이가 벤튼과 연애를 하는 걸 보고 그 사람이 인종편견에 신경 쓰지 않고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근사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97년의 일입니다. 1년 뒤 앨리가 그렉 버터스와 데이트를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그런 흑백간의 연애를 당연하게 여기는 자신들이 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이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인종간의 편견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타인종간의 연애는 트렌드이기도 하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전형적이지 않은 이런 관계를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즐기고 받아들이는 자신이 대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텔레비전 시리즈의 동성애 커플에게 이성애자 시청자들이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단지 터부가 더 약해서 더 관대할 뿐이죠.

그렇다면 다시 [파 프롬 헤븐]으로 돌아가보기로 합시다. 이 영화는 2002년 작품입니다. 흑백 커플이 화면 위에서 온갖 다양한 체위를 선보여도 아무도 타부를 건드렸다고 생각하지 않는 시기에 만들어졌죠. 게다가 감독인 토드 헤인즈는 척 봐도 소위 '할리우드 좌파'에 속하는 사람이며 게이입니다. 그런 사람이 흑백 연애담을 만들면서 타부라고 주저하기나 했겠습니까? 그런 영화에서 키스신 한 번 나오지 않았다면 그건 1950년대라는 시대 배경에서 그런 행동이 당연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건 이 '영화 읽기'가 중요한 교훈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념과 사상, 종교가 제공하는 선입견의 노예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현실의 관찰을 바탕으로 사고하는 대신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현실을 맞추어 보기 마련입니다. 관찰과 분석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니 그걸 자기 대신 생각해준 사람들에게 맡겨버리는 것이죠. 결국 우리는 제한적인 의미에서 장님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특히 책의 회색 지식에 의존하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에게 그런 경향이 크죠. 그것도 초단위로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물건너온 책들을 통해 간접 섭취해야하는 우리들은 더욱 심각하고.

이런 게 영화나 책에 대한 논문을 써서 학위라도 따려는 사람들 안에서 빙빙 도는 지식이라면 우리가 특별히 신경 쓸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대외 정책처럼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대상에 대한 비판에 이런 게으른 사고가 관여한다면 사태는 심각해질 수 있죠. 한 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정말 사실에 가깝긴 할까요? 답의 일부는 우리가 무거운 몸을 움직여 대상을 직접 바라보기만 해도 나올 겁니다. (0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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