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이야기...(폐세)

2017.01.20 00:56

여은성 조회 수:953


 1.살아있는 한 걱정하는 것을 멈출 수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나의 경우에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왜냐면 나의 경우엔 걱정이 없는 상태라면 체념하기로 한 것일테니까요. 희망이 없다는 걸 알아버리고 그냥 체념하고 이 인생이 내 인생이라는 걸 받아들인 상태겠죠. 그런데 체념하는 것보다는 그냥 죽는 게 더 낫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걱정이 없는 상태로 살아있는 일은 아마 없을 거예요.



 2.이렇게 쓰면 마치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 같겠지만 그렇진 않아요. 언젠가 썼듯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이미 다 해 놨거든요.


 이미 카지노의 룰렛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흰색 당구공이 당구대를 달리기 시작했고, 야구공은 투수의 손에서 떠나간 그 상황이예요. 다만 그 상황이 매우 길게 늘어지고 있는 중인 거죠. 중간중간에 이런저런 조정은 해줘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큰 것들은 이미 궤적을 그리는 중인거예요.  


 누군가는 '그러면 이건 좋은 불안함 아니야?'라고 할 거예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봐 하는 걱정이니까요. 하지만 걱정은 걱정이거든요. 걱정하는 기간이 늘어지면 늘어질수록 나를 갉아먹어 버릴거예요. 


 결국 카지노의 룰렛을 맞추든, 흰색 당구공이 목적구를 집어넣든, 야구공이 멋지게 스트라이크존으로 빨려들어가든...이미 걱정이 나를 다 갉아먹어 버린 후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3.사실 이 일은 이제 둘 중 하나예요.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거나 둘 중 하나고 어떤 경우든 이제 내가 컨트롤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일이예요. 그러니까 사실은 걱정을 하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거죠. 걱정을 해봐야 결과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뇌 속에 있는 걱정 공장은 절대 멈추지 않는거예요. 결국 좋은 일이 너무 늦게 일어나는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내가 그 미래를 맞이해도 한쪽 입가만으로 웃고 거울을 몇 시간 동안 가만히 들여다보며 눈물흘리는 광경을 재생시켜 주는 거죠.


 그야 좋은 일이 근시일 내에 일어나고 내가 걱정을 그만두는 미래도 있겠죠. 하지만 나는 긍정적인 사람은 아니라서요. 그런 미래는 그리지 않아요.



 4.휴.



 5.학교를 다닐 때 어떤 외국인 교수가 있었어요. H라고 해 두죠. H는 늘 웃고 다녔고 립서비스가 심했어요. 좋은 걸 넘어서 너무 심했죠. 병신같은 것들을 봐도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칭찬을 해대곤 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H에게 '굿, 굿. 베리 굿'같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매우 나빠지곤 했어요. 이건 H가 과제물에 대고 해주는 말들 중 가장 강도가 낮은 반응이었으니까요. 


 H가 과제물에 대고 '굿'이라고 하면 '존재할 가치가 없는 쓰레기라고 말하고 있군.'이라고 마음대로 해석하곤 했어요.



 6.H는 졸업전시회를 할 때도 학교에 남아 있었어요. 졸업전시회를 다 마치고 교수들이 학생들의 졸작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품평을 해주는 시간이 있었어요.


 솔직이 이제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는 학생들을 상대로 나쁜 말을 꺼내는 악취미적인 교수는 없었죠. 그게 한국 교수들이든 H든요. H는 역시 입 찢어지는(글래스고 스마일 같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원더풀, 엑셀런트.'같은 표현을 동원하며 학생들의 졸작을 하나하나 품평해 줬어요. 


 그리고 내 차례가 왔어요. 그리고 나는 H가 어떤 호들갑을 떨어도 전혀 감동받지 않을 거였어요. 이미 영어로 표현할 수 있는 미사여구를 다 동원한 H가 뭘 말하든 여기서 더 새로운 호평은 있을 수가 없을 거였으니까요. H가 내 졸작테이블에 와서 말했어요. 뭔가 길게 말하긴 했는데 알아들을 수 있던 부분만 한국어로 써요.


 '세계적이야. 이 친구는 세계적인 친구야.'


 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왜냐면 그의 말만이 아니라 그가 무표정으로 그렇게 말해서요. 보고 싶은 걸 본 건지도 모르겠지만 늘 웃던 그가 무표정으로 말하니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7.그리고 나는 내게 빛나는 미래가 있을거라고...대학원도 가고 유학도 가고 이름을 알릴 수 있을 거라고 안심했어요.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매우 강하게 들어서 걱정을 그만두고 밝은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나는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내가 잘하는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요. 여기까지 쓴 내용으로 보면 뭔가 좋은 일이 있었을 것 같아 보이겠죠. 아니면 하다못해 밝은 일이라도.


 그러나 어떤 일에 발목잡혀서 결국 그쪽 길로 가는 문은 닫혀버렸어요. 그리고 이제 밤에는 어두침침한 곳에서 술을 마시고 낮에는 밤이 되길 기다리며 살고 있죠. 때워져야만 하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요.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은 이렇게 인터넷 게시판에 쓸데없는 글을 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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