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23 16:12
사실 제목이 별로 제 취향이 아니어서 예고편도 안 보고 있다가 어젯밤에 본방송을 봤는데요.
아흔 살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를 이렇게 에로틱하게 찍을 수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아직 며칠 더 남았지만) 저에겐 올해 가장 인상깊은 EIDF 다큐가 될 것 같아요.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떤 남자 무용수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들이 있는 요양병원에 가서 할머니 한 사람 한 사람과 춤을 춥니다.
자기 이름도 잘 기억 못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들이 춤이라는 걸 제대로 출 리가 없겠죠.
그런데 이 남자 무용수는 각 할머니의 몸 상태에 맞춰서 능수능란하게 리드하며 아주 멋지게 춤을 춥니다.
덕분에 할머니들은 어리버리한 상태, 그냥 이 남자에게 몸을 맡기면 저절로 춤이 나오는 그런 상태에서
잠깐 동안 마치 무대 위의 여주인공이 된 것처럼, 마치 이 남자 무용수에게서 구애를 받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가 된 것처럼
젊은 시절 느꼈던 로맨틱한 감정을 맛보게 되죠.
이 남자 무용수는 50대쯤 되어 보이는 베트남과 프랑스의 혼혈인데 차림새는 무슨 부랑자 같지만 춤은 멋지게 춥니다.
할머니들은 로맨틱한 노래와 춤의 분위기에 취해 어질어질 혼미한 상태인데도 잘생긴 청년에게서 구애를 받은
10대 소녀처럼 즐거워하고 흥분한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어떤 할머니는 이 남자 무용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도 해요.
이 지점에서 저는 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이런 춤을 계속하는 것이 이 할머니들에게 좋은 것인가...
남자 무용수와의 로맨틱한 춤이 할머니들에게 젊은 날을 환기시키고 삶의 에너지를 불러 일으키는 즉각적인 효과를 주긴 해도
사실 이 춤은 잠깐 동안 무대에서 벌어지는 연극과도 같은 것인데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는 그것을 현실처럼 느끼고
연애 감정을 갖는 모습에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말 아홉 살 소녀 같은 모습... ㅠㅠ)
이 남자 무용수와의 춤이 할머니들에게 불러일으킨 어떤 에너지는 기쁨도 배가시킬 수 있지만 고통도 배가시킬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마음이 복잡해지더군요.
나이가 든다는 게 젊음이 불어넣는 어떤 감정적인 에너지를 잃어가는 과정이라면, 그런 에너지의 상실은 삶에서 맛볼 수 있는
기쁨과 흥분도 줄어들게 하지만 삶에서 맛볼 수 있는 (자신에게 가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느끼는) 격렬한 심리적 고통들도
줄어들게 하겠죠. 그야말로 자신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 대한 모든 감정이 조금씩 둔해지고 무감각해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에너지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건 삶의 기쁨도 다시 증폭시키겠지만 감정적인 고통도 다시 증폭시키게 되겠죠.
알츠하이머에 걸려 시들어가는 할머니들에게는 이 남자 무용수와의 춤을 통해 얻는 삶의 활력이 좀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 감각에 좀 문제가 있고 감정적으로 상처를 받는다고 해도 혼자서는 되살릴 수 없는 그런 에너지가 필요할 거예요.
어쩌면 나이가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그런 에너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매력적인 여성으로, 혹은 매력적인 남성으로
보아주는 그런 시선과 몸짓만이 줄 수 있는 에너지가 있는 것 같아요. 그건 그냥 사람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욕망인 것 같습니다.
이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생의 활력이 시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나이가 드신 분들께 정말 필요한 것은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느낌은 그냥 기계적으로 돌봐주는 것으로는 도저히 충족될 수 없는 것이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눈빛과 몸짓과 행동으로
느껴져야 하는 것이고 춤과 같은 어떤 신체적 접촉과 움직임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고요.
나이가 90이 되어도, 알츠하이머에 걸려도, 누군가 자기를 여자로 보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저 밑바닥에 여전히 남아있는 걸 보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욕망과 고통을 생생하게 맛볼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죽음 혹은 늙음으로부터 조금은 멀어질 수 있는 건가
생각하면서, 아마도 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삶의 에너지를 다시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삶을 선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선택이 가능하다면요...)
결론은... 이 다큐 재미있습니다. 보시려면 => http://www.eidf.co.kr/dbox/movie/view/307
2017.08.23 18:12
2017.08.24 10:30
정말 잘 읽었습니다. 문학작품을 읽다보면, 몸만큼 마음이 안늙어서 그 괴리에 괴로워하는 군상들이 많은데, 나이가 들다보니까 언더그라운드님말씀처럼 마음도 어딘가 쇠잔해지고 (지적쇠퇴는 차치하더라도) 주위와 거리를 두게 되는 신산함이 있는 것 같아요. 대학신입생들이 초콜릿을 먹으며 지나가면서, "이게, 애들때 먹던 맛이 안나네, 애들땐 이걸 먹으면 머리안에서 불꽃이 나는 것처럼 화끈하게 맛있더니.. 지금은 그냥 설탕처럼 단맛만 나. 나이가 들어 이런가" 거참, 만 20살도 안된 사람들이 그런말을 하니까 좀 기가 막히긴 했지만, 무슨 말인지는알것 같아요. 사소하게는 먹는 것부터, 그 기쁨이나 슬픔의 엄청난 '화끈함'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게 꼭 슬픈일은 또 아닌것 같기도 하구요.
그건 그렇고 언더그라운드님이 올려주시는 글들을 보는 즐거움이 정말 특별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
2017.08.24 12:57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둔해지고 무감각해지는 건,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욕구를 억제하려는 의식적 무의식적 노력의 또 다른 결과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어요.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 욕구를 드러내고 실현시키기가 점점 힘들어지니 그 욕구를 억제하고 무시하려는 노력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는데 이런 노력이 지속될수록 점점 자신의 감정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그냥 사는 게 아무 느낌 없어지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은 잘 모르겠고 눈에 보이는 선택지는, 자신의 욕구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늙어서도 자기 감정에 충실한 주책바가지가 되느냐, 아니면 자신의 욕구를 외면하고 억누르면서 점점 무감각해지고 무기력해지는 삶을 사느냐, 이 두 가지인데 주책바가지가 되는 선택지는 흥분과 전율을 맛보게 하지만 수치와 고통을 동반하는 삶을 살게 할 테고, 무감각해지는 선택지는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결국 우울증과 자살로 가는 삶을 살게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다큐에서 90세 할머니가 자기보다 40살은 더 어린 남자 무용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관객인 저에게도 참 여러 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키더군요. 그 할머니가 맨정신이라면 자신의 고백이 거절당했을 때 감당해야 하는 수치심과 고통이 어느 정도일까 상상이 안 돼요. 그런데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다 내보이는 그 할머니의 소녀 같은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눈에서는 거의 레이저 광선이 나오더군요. 다큐 시작 부분에서 산 송장 같았던 얼굴과 흐리멍텅한 눈이 아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위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릴 테고 그 가운데에서 적절한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겠지만 그게 힘들다면 결국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첫 번째에 가까운 선택이 아닐까 생각해요. 아마도 저는 나이가 들수록 주책바가지가 되어 있을 것 같은 강력한 예감이 드네요. ^^
(Diotima 님의 댓글을 읽고 갑자기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서 써봤어요. 제 글이 댓글 달기 힘든 감상글인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각을 나눠주시는 따뜻한 댓글을 받으니 기뻐요!!!)
본문에는 <아흔 살 소녀 블랑슈> 얘기만 썼는데 이번 EIDF [페스티벌 초이스]에 나온 다큐들 중에
좋은 작품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틀 동안 재미있는 다큐들을 보면서 저는 감동의 도가니입니다.
제가 재밌게 본 다큐 몇 편...
<우리 사랑 이야기> 어린아이 같은 지능을 가진 40대의 다운증후군 환자들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하더군요. (자식을 낳으면 그 책임은 어떻게 질 것인가...)
http://www.eidf.co.kr/kor/movie/view/311
<헤르보르 이야기> 그림으로 보여주는 한 여인의 인생 이야기인데 인물들의 표정을 어찌나 강렬하고
생생하게 그렸는지 보는 동안 내내 가슴 아팠습니다.
http://www.eidf.co.kr/kor/movie/view/306
<라스트맨 인 알레포> 시리아 내전에서 폭격 후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파헤치며 사람들을 구조하는
민간구조대의 이야기입니다. 잔해 속에 갇혀 있었던 다친 아이들의 모습에 그냥 눈물이 나더군요.
http://www.eidf.co.kr/kor/movie/view/310
오늘 밤 9시 50분에 방송하는 <데이빗 보위: 지기 스타더스트 마지막 날들>도 재밌을 것 같고
그 뒤에 방송하는 다큐들도 힘 닿는 데까지 보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