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니?"라는 질문

2019.02.17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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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밥상에서 아버지가 뜬금없는 질문을 하셨어요.
"행복하니?"
- (어리둥절~)...... 행복이 뭐가 그리 중한디?

반문하는 순간, 어느 영화에선가 우리가 주고받는 대사를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니라면 항용 가능한 대화라고 제가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행복이 그렇게 중요하냐?'는 질문을 답으로 던질 수 있는 사람이에요. 행복은 제게 애매모호한 '무엇'입니다. 익숙한 일상어도 소리내어 여러 번 발음하다 보면 낯설고 불투명해지기 마련인데, 행복이란 단어도 접할 때마다 새로운 사물을 어루만지는 기분이 돼요.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래, 뭐지? 몇 번쯤 되새김질하다 보면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져들며 어떻게 접근해야 그 얼굴을 볼 수 있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어요.

지난 여름 프라하에 갔을 때, 이젠 봉쇄되어 있는 옛수녀원을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부재가 곧 존재인 곳으로 자신을 몰고 들어온 사람들이 가장 고요하게, 가장 혁명적인 삶을 펼쳤을 공간. 
그러나 생의 구차한 즐거움에 사로잡혀 사는 저에게 그곳의 청정함은 처연함이기도 했어요. 어둡고 긴 회랑을 돌다가 안내를 맡았던 현지 교수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더랬죠.
"그분들은 이곳에서 행복했을까요?" 
그러자 교수가 오히려 제게 반문하더군요.
"그들에게 행복 따위가 무슨 의미였을까요?" 
순간 제 질문이 얼마나 유치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몰래 한숨을 쉬었습니다.

'행복하니?'라는 질문은 언제 어디서나, 말하기로도 듣기로도 매우 민망스러운 말이에요.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는가를 생각하지 못하는 단순함이 묻어나거나, 상대방을 정열만을 좇는 사람으로 가차없이 간주해버리는 어색함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는 관용어를 절대 옳다고 생각할 만큼의 확신이 제게는 없어요. 우선 저부터 행복을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넌 뭘 추구하는데? 라고 묻는다면 말문이 막히지만, 그것이 '행복'이 아닌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어요.

서양 아포리즘들을 읽다 보면 '행복이란 안심 혹은 평온이다' 라는 밋밋한 정의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과연 그정도의 의미인 걸까요? 찌르는 듯한 혹은 덜덜 떨게 만드는 추위와 공포와 불안과 멀미를 면제받는 것- 그게 우리를 안심시키는 행복에 다름 아닌 것일까요?
십여 년 전 어느 소설에서 '그러나 근본에 있어선 사는 동안 나는 언제나 행복했다'는 구절을 읽었을 때, 저는 그 뜻을 이해했었습니다.  외면생활의 서사가 어떻게 진행되는가와 무관하게, 주인공이 지닌 생생한 내면감정은 인생 자체에 대한 감동이었거든요. 즉 존재론적인 차원의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어느 날, 저는 누군가를 향해 편지에다 이렇게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마워, 너로 인해 나는 행복해."
그러나 그때의 '행복'도 성찰의 언어가 아니라 관계와 시간에 대한 긍정의 언어 정도일 것 같아요.
현재의 제게 있어 신기루 같고 모호한 성질의 행복이란 삶에서 뭔가를 포기한 다음에나 원하게 될 가치입니다. 일종의 타협과 균형의 장소로서 원하기 시작할 어떤 것.

뻘덧: 식사 후 두 시간 째 아버지는 수십 년 사용해온 사인을 바꾸고 싶다며, A4 용지 수십 장을  늘어놓고 혀를 꼭 무신 채 연구 중이십니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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