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멸과 동정

2019.04.03 05:56

어디로갈까 조회 수:1467

회의에서 프로젝트의 진행 방향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예의와 분별을 아는 사람들인데 어제는 좀 이상했어요. 상대의 의견을 제압하려고 나쁜 방식으로 서로를 자극하더니, 급기야는 일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사적인 감정의 대립으로 치닫고 말더군요.
국적이 다른 A와 B가 있습니다. A는 B를 경멸한다고 했고, B는 A를 가엾게 여긴다고 했어요. 경멸과 동정. 어떤 게 더 견디기 쉽고,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우울한 의문입니다.

어느 사진집의 평문에서 '초점을 맞출 수 없어 우리는 상처입는다.'는 구절을 본 적이 있습니다. 피사체의 윤곽이 겹쳐지고 흐릿하게 초점이 잡혀 있는 사진들이었는데, 평론가는 그 사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선명하게 볼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상처받았노라는 감상을 적었어요. 제게 어필한 표현이자 사고였습니다.

(주:  Michal Rovner/Nun )

A와 B의 대립을 관망하노라니 새삼스레 그 사진들이 떠올랐고, 그 표현이 보다 잘 이해되는 느낌이었어요.
바라본다는 행위에 대한 강력한 저지를 내장한 이미지는 얼마나 인식비판적인가요! 더구나 피사체는 인간이었습니다. 아마 사진가는 그 작품들을 통해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를  보여주고자 했을 거에요. 그토록 어둑하고, 서늘한, 인물사진들로 말입니다. 그러니 상처받는다는 표현보다는, 상처를 되살린다는 말이 더 합당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또렷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흐릿함이 때로는 관계의 자비로움일 수도 있을 거에요.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우린 또 얼마나 관계들을 원하는가요! 
그러니까 흐릿함 안에 집을 짓고, 길을 놓고, 태양을 띄운 뒤, 비틀비틀 걸어가는 겁니다.  서로 손을 잡거나,  손을 잡지 못한 채.

덧: 두 사람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어릴 때 할아버지가 선물하셨던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이 생각났어요.  그때 제 눈을 맞추고 남기셨던 이 말씀도.
" 이 인형 시스템은 끝없이 나오는 인형들을 즐기라는 놀이가 아니라 '인간은 깊다'는 적나라한 진실을 보여주는 거란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613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6168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6237
123631 오랜만에 만화잡지를 주문하고 상수 2023.07.02 211
123630 피프티피프티, 소속사 분쟁 [4] 메피스토 2023.07.02 743
123629 [영화바낭] 세기말 일제 호러 붐의 시작, '링'을 다시 봤습니다 [10] 로이배티 2023.07.02 467
123628 프레임드 #477 [4] Lunagazer 2023.07.01 121
123627 [넷플릭스] 마당이 있는 집, 잘 만든 건 알겠는데... [5] S.S.S. 2023.07.01 774
123626 [넷플릭스] 생각보다 재미있잖아?! ‘dc 타이탄’ 챕터1 [4] 쏘맥 2023.07.01 305
123625 디즈니플러스 가입했습니다 catgotmy 2023.07.01 181
123624 매해 7월 1일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영화 [1] 상수 2023.07.01 278
123623 인어공주 (1989) [5] catgotmy 2023.07.01 317
123622 R.I.P Alan Arkin(1934~2023) [6] 상수 2023.07.01 296
123621 주말 저녁에 붙이는 쇼츠 Taylor Swift , Lady Gaga, The Cranberries [2] soboo 2023.06.30 200
123620 갈티에 인종차별 구금으로 엔리케 파리 감독 부임 늦어질 수도 [4] daviddain 2023.06.30 180
123619 [티빙바낭] 클라이브 바커 원작 영화 중 최고점(?), '북 오브 블러드' 잡담입니다 [6] 로이배티 2023.06.30 348
123618 아이즈원 출신 솔로가수 최예나의 HATE XX 이야기 [2] 상수 2023.06.30 464
123617 참외 원래 이렇게 먹나요 [9] 가끔영화 2023.06.30 378
123616 애니 리버비츠 베니티 페어 할리우드 화보 모음(2010~23) [7] LadyBird 2023.06.30 301
123615 프레임드 #476 [2] Lunagazer 2023.06.30 94
123614 스타크래프트 1 이야기 - 프로토스 대 테란 입스타의 끝!! [6] Sonny 2023.06.30 336
123613 누구의 팔일까요? [4] 왜냐하면 2023.06.30 235
123612 아스날 옷 입은 하베르츠네 강아지들 [2] daviddain 2023.06.30 27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