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장, 행복한 라짜로 봤어요

2019.08.02 20:56

보들이 조회 수:824

- 일본계 미국인 감독의 시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파고든 <주전장(主戰場)>은, 러닝타임의 많은 부분이 인터뷰를 통한 증언과 주장, 논박으로 촘촘히 엮여 있습니다. 
상당히 방대하고 다각적인 정보들이 때로는 자막을 다 못읽을만큼 속도감있게 제공되고, 영화가 객관적인 자세를 취할수록 일본 수정주의자들의 논리모순과 청멍함은 스스로 드러나고 맙니다. 자폭으로의 외통수랄까(...)
박원순 변호사가 자료화면에서 한 2초간 스쳐지나갑니다. 매의 눈으로 발견!!ㅎㅎ

일본 내에서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학자들이나 시민사회 관련자들이 나올 때는 왠지 더 집중해서 보게 되기도 했어요. 
일본같은 사회에서 그런 목소리를 낸다는건 정말 본인과 가족들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 같았거든요.
일본군 "위안부"를 주제로 다루고 있으나, 깊게 추적할수록 결국 도달하게 되는 본진은 아베의 "일본회의"라는 집단입니다.
현 시국의 경제왜란을 일으키고 있는 바로 그 주범들이지요.

어느 방송에선가 조승연 씨가 영국에서의 일화를 얘기했던게 생각이 났어요. 
런던 나들이를 나온 한 90세는 넘어 보이는 노부부가 길을 묻길래 알려드렸는데, 영어를 잘한다고 칭찬하면서 "우리의 동방 식민지에서 왔느냐"고 묻더랍니다. 
아마 그들이 젊었을 때는 대영제국이 존재했을테고, 세상이 바뀐걸 잘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국에서 유학했다고 설명을 했는데, 머쓱했는지 "그럼 우리의 서부 식민지에서 왔느냐"고 하더라는.

일본 우익 노친네들의 생각은 대영제국 시대를 살았던 영국 시골 노인들과 거의 같은 지점에서 멈춰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90년대생들이 삼성은 알아도 소니는 모른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며, "영광된" 과거를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종교적인 믿음에 심취한 듯해요. 
도라이야 어디에나 있지만, 그런 집단이 국가의 핸들을 잡고 있으니.. 끝을 알 수 없는 이 싸움. 아득해지는 마음을 가다듬어 봅니다.



- 행복한 라짜로.. 
바람도 안부는 사막처럼 삭막하고 무덤덤했던 감성 회로에, 참 오랜만에 깊숙이 와닿아 준 영화였습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토리노의 말>에 대한 평으로 '여전히 위대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 것에 공감했었는데, <행복한 라짜로>를 보고 다시 한 번 그 평이 떠올랐어요. 

이태리 어느 작은 마을의 한밤중의 세레나데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전통적인 시골 동네의 모습과 마치 다큐인듯, 혹은 고전영화의 한 장면인듯 연출된 화면은, 이 영화가 어느 시대를 다루고 있으며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까지도 불분명한 느낌을 줍니다.

영화는 '후작부인의 대 사기극'이라는 장치를 이용해 수십년의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는 마법을 보여줍니다. 
이 수십년은 실은 수백년 혹은 수천년의 인간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우화일 수도 있고, 그 시간들은 초월적인 한 존재의 시선으로 관통되고 있습니다.

이 초월적 존재는 분명히 예수를 닮아 있지요. 
하지만 종교가 없는 제 입장에서 꼭 기독교적이라는 인상을 받진 않았어요. 
그는 부처나 혹은 다른 문명의 어떤 성자와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이 영화의 색채는 특정 종교의 그것이라기 보다는 유럽인들의 전통 문화적 색채라는 인상에 더 가까웠습니다. 

라짜로의 끝없는 선함과 낮음.. 
마치 옛 성당 벽화 속의 천사가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은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의 얼굴. 
그가 그 순수하고 예쁜 눈을 깜빡이며 '물론이지.'라고 할 때마다, 그 절대선에 대한 동경과 가여움으로 마음이 아파 왔어요. 

마치 고전영화의 현대적 재해석 같은 연출 스타일은 '시네마'만이 줄 수 있는 심미적 즐거움마저 한껏 만끽하게 해주었습니다. 
참 아름답고, 공유하고픈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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